키메라의 땅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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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단 한 가지 동물, 즉 인간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pp. 597 백과사전: 인류세)'

우리 행성에서 6차 대멸종이 진행 중이다.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 생물의 다양성 감소 등 대멸종 원인 제공자는 인류세의 주인공 사피엔스다. 과연 사피엔스는 환경 변화에 적응해 대멸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망이 어둡다. 곧 특이점에 도달할 AI와 핵무기가 결합할 경우 그 파괴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3차 세계 대전 몇 년 전, 보안 문제는 인공 지능 시스템에 일임되었어요. 중요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신속하고 믿을 만하다고 여겨졌죠. 하지만 그들에겐 양심도 거리낌도 없었어요. 그들은 프로그램된 대로, 즉 미사일 공격에는 더 파괴적인 다른 미사일로 반격하여 임무를 완수했죠. 3차 세계 대전이 그토록 신속히 진행됐고 더욱이 그토록 파괴적이었던 건 그 때문이에요." (p. 214)'


'이 이야기는 당신이 이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5년 후에 일어난다. (p. 11, 일러두기)'

변신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알리스 카메러는 유전자 조작 기술로 공중을 나는 인간 '에어리얼 Aerial', 땅을 파고들어 가는 인간 '디거 Digger', 헤엄치는 인간 '노틱 Nautic' 세 가지 아종의 새로운 인류 개발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인류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도 생존하기 위해서다.

''키메라'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키마이라 Khimaira에서 왔는데, 이는 염소의 몸통, 사자의 머리, 뱀의 꼬리로 이루어진 그리스 신화 속 피조물을 가리킨다. (p. 423 백과사전: 키메라)'

하지만 프로젝트가 밝혀지자 반대에 부딪히면서 위협까지 받게 된다. 할 수 없이 알리스는 410킬로미터 상공 우주정거장에 머물면서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그사이 지구에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핵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다.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돌아온 알리스는 인간과 박쥐, 두더지, 돌고래, 3형제 혼종 키메라를 탄생시킨다. 세 종의 신인류는 지구에 살아남은 구인류와 어떤 생존 방식을 선택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어리얼은 공기, 노틱은 물, 디거는 흙, 세 원소에 이은 불에 기초한 인간과 도롱뇽 혼종 '파이어'는 또 구인류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할까.

'"세 종의 신인류를 창조하면서, 나는 구인류와 각기 다른 세 가지 관계를 창조했어. 에어리얼과는 협력 관계, 디거와는 중립적 관계, 노틱과는 파괴의 관계지..." (...) "... 하지만 절 빼놓으셨어요." 악셀이 말한다. "전 네 번째 원소의 대표잖아요. 불 Feu의 F를 더해야죠." (p. 600)'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찾아떠나는 선택보다는 어쩌면 어떤 재난이 닥쳤을 때 공중에서, 땅속에서,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선택이 더 나아 보인다. 그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키메라의 땅>이라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도 봤듯이 신인류가 전쟁을 일으키는 유전자도 종족을 차별하는 유전자도 모두 가지고 있다면? 걱정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되풀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7차 대멸종의 주인공은 혼종 신인류, 키메라가 될 것이다.

인류세를 버리고 인류의 미래를 자연의 선택에 맡기는 건 어떨까? 물론 사피엔스가 욕망을 참아내는 것이 먼저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연은 언제나 다양성으로 생존의 길을 찾아왔으니 최선의 선택임이 분명하다.

2020년 7월 프랑스 국회에 인간 배아 줄기세포 재료로 한 키메라 창조를 허가하는 내용의 법안이 제출됐지만 다행히도 부결됐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과학적 또는 의학적 이익보다 생명 윤리가 중시되지만, 이런 상황이 얼마나 더 갈까?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방법을 사피엔스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갈 것 같지는 않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5년 예언이 너무 이르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결국 10년이든 15년이든 그 이상이든 지구가 키메라의 땅이 될지도... 대멸종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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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정, 최후의 날
이중세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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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우리가 지닌 모든 걸 걸고, 저 싸움을 해왔어. 빈약하고 가난한 싸움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우리가 지닌 모든 걸 다 퍼부었네. 저 상해에서."
"그리 싸웠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줄까요? 그림자 밑에서 이뤄진 비루한 싸움인데." (p. 294)'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대통령은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역사를 기리고, 독립유공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며 '독립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해 임정, 최후의 날>은 1932년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바탕으로 한 역사 소설이다. 상해에는 강대국들이 득실거렸다. 외신기자도 많았다. 김구는 들어줄 상대가 많은 이곳에서 독립을 부르짖어야 했다.

일제는 임시정부로 흘러들어가는 독립자금을 막아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밀정을 통해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했고, 의심과 분열을 유도했다.

'김홍일은 잠자코 김구의 말을 기다렸다.
"내 진짜 걱정은 이런 거라네. 3월 1일에 펄럭이던 태극기들이 잊히는 거. 안중근 의사의 총소리가 잊히는 거. 상해 임시정부의 존재가 잊히는 거." (p. 44)'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주도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봉창을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일본 군함 이즈모 폭파 시도했으며,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은 물통 폭탄과 도시락통 폭탄을 던져 의거를 벌였다. 이들 독립투사 대부분 대한제국이 1910년에 막을 내렸으니 나라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그들은 윤봉길의 눈을 흰 천으로 넓게 가리고는 미간에 총을 쏘았다. (...) 시신은 계단 바로 밑에 묻혔는데, 모두 지나가며 죽은 자를 밟으라는 뜻이었다. (p. 297)'

이들의 항쟁은 '아직 임정이 살아있음을, 독립운동의 숯불이 하얀 재 밑에 뜨겁게 존재함을 (p. 121)' 일깨웠다. 이 외침이 조선과 중국은 일깨웠지만, 일본에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2년 전 3.1절, 한 아파트 주민이 일장기를 내 걸었던 사건이 있었다. 항의가 거세자 일본인 행세까지 했던 주민은 한국인이었고 교회 목사로 밝혀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이 협력관계에 있는 국가라는 점을 밝혔기에 이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일장기를 내걸었다.'라는 떳떳하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난 3년 동안에 그 어느 때보다 일장기를 내건 사람과 같은 친일파가 득세했다. 친일은 넘어 굴욕적인 외교를 일본을 상대로 펼친 정권이기도 했다. 그 정권에 발탁된 여러 사람들을 보면 친일파 후손이거나 일본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안공근, 김철, 노종균, 엄항섭, 이화림, 이봉창, 윤봉길, 최홍식, 유상근, 이덕주, 유진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친일에 앞장섰던 자들의 후손들이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오히려 독립운동 역사를 부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했다.

지난 12.3 내란 이후 독립투쟁하듯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응원봉을 들고 나선 청년들 덕분에 광복 못지않은 빛의 혁명을 이뤄냈다.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로소 '독립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행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됐다.

'그렇기에 나라는! 우리 민족의 얼, 그 자체인 겁니다. 얼을 빼앗기고, 정신을 빼놓은 살아있는 시체처럼 함부로 매 맞고, 꿈과 미래와 행복을 박탈당한 우리이기에, 무엇보다도, 나라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의 얼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다시 정신을 지닌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살아나기 위해, 우리에겐 독립이 간절한 겁니다!
김구의 외침이 산을 뒤흔들었고, 목소리에서는 날카로운 톱날의 불꽃이 튀어나왔다. 스승을 바라보는 김구의 눈동자가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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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은 인생의 날개다 - 포니 픽업 야채 장수에서 물류 기업 CEO까지
이강미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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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물류 업계 선두에 자리 잡은 '날개물류' 이강미 창업주는 내 또래다. 책을 읽으며 그의 나이에 맞춰 내 나이를 생각했다. 스물다섯 살 이강미는 포니 픽업에 채소를 싣고 미래 남편과 골목을 누볐다. 스물다섯 살 나는 군 복무 중이었다.


<간절함은 인생의 날개다>는 포니 픽업 채소 장수에서 물류 기업 CEO가 되기까지 삶의 여정을 고백한 이강미의 성장 에세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강미의 인생 드라마에도 여느 인생처럼 주먹을 불끈 줘야 할 때가 있었고, 좌절을 맛보며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간절함으로 날갯짓하며 그가 그림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갔다.

스물여덟 살 이강미의 '날개'는 도서 배본 대행사로 인정받아 거래처는 일흔 곳으로, 차량은 일곱 대로 늘어났다. 그즈음 나이에 나는 첫 직장에서 새로운 발걸음 내디뎠다.

IMF 바람이 출판계에 세게 불어닥칠 때 서른여섯 살 이강미는 그 악재를 호재로 바꾸며 버텼다. 늦게 결혼한 서른여섯 살 나 역시 정리해고라는 거센 바람을 새롭게 꾸린 가정 문 앞에서 온몸으로 막아서야 했다.

'1999년 우리는 회사를 두 개로 분리했다.
'(주)날개물류'라는 법인을 만들어 남편이 창고관리 전문회사로 키워보기로 했고,
나는 '황금날개'라는 상호를 만들어 배송 전문회사로 키워보기로 했다. 이렇게 다시 날개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p. 127)'

60대에 들어선 나는 나의 첫 직장 테마파크에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하며 나머지 삶을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다. 60대 중반에 들어선 황금날개 이강미 대표이사는 마지막 꿈을 준비하고 있다. '책 테마파크!'

'그리 큰 면적은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게 예쁜 공원을 만들어 쉬는 날에는 직원들과 거래처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찾아와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완성하고 싶다. (p. 219)'

그곳에서 이강미 대표는 남편과 은퇴 후 삶을 모색할 것이다. 계획을 조밀 조밀하게 세웠으니 바쁜 삶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저자 이강미만큼 내 삶도 간절함이 있었을까? 치열함은... 비교하고 판단할 삶이 어디 있을까. 무시당해 마땅한 삶은 없다. 모든 삶은 소중하다. 하지만 저자 이강미가 펼친 '날개'가 부러운 건, 그는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나는 만들어 놓을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진행 중인 삶에 존경하는 마음을 보내주고 싶다.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어느 날 문득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날개'라고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꿈은 원대하게!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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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절의 농담 - 담도암 4기, 시한부 6개월을 완치로 바꾼 기적의 시간들
박주혜 지음 / 브로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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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도 어김없이 지난 12월부터 시작된 줌 독서토론에서 주혜 작가를 만났다. 펌을 한 내 모습을 보며 머리 스타일이 멋있다는 말을 건넸다. 8월 말 주혜 작가의 북토크에서 멋진 모습으로 축하하려고 미리 준비한 거라며 독서토록 멤버들과 함께 농담을 주고받았다.

지난해 7월 암 진단 직후부터 1년여 동안 진행된 내 평어 책 친구 주혜의 운명과 한판 줄다리기한 스토리는 농담을 주고받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기도밖에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 '나 완치됐어~'라는 주혜 입에서 나온 마법 같은 말은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그 암울했던 시간에서 비로소 풀려났다.


지난해 7월 12일 주혜 작가는 인별을 통해 암밍아웃이란 걸 했다. "저... 췌장암이라네요." 무슨 농담처럼 말이다. 한동안 멍했다. 이 농담 같은 소식을 아내에 말했다. 아내에게 암이라 말은 절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결혼 후 딸 하나를 낳고 세상을 떠난 큰 누님은 어머니에게 참척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어머니는 아홉수라 하던가? 칠순을 눈앞에 두고 암으로 눈을 감으셨다. 목회하던 형님 역시 마흔 중반에 아들 둘을 남긴 채 암으로 세상을 등지며 일찍 아내를 잃은 아버지에게 참척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아내에게 암은 남편의 가족력으로 각인되었다.

아내도 잘 아는 내 둘도 없는 불알친구는 지금 십이지장 암 수술 후 몇 년 동안 잘 지내다가 다시 암 투병 가운데 놓여있다. 역시 아내도 잘 아는 내가 존경하는 대학 친구의 아내분도 'her2'라는 암으로 투병 중이다. 다행히 모두 잘 견뎌내고 있어 고맙다.

주혜 작가의 암밍아웃에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한참 망설였던 이유다.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힘들겠지만 이겨내야 한다. 기도하겠다, 여느 때처럼 행동해야 한다...' 기껏 생각해 내 적은 댓글이 한심했다. 뻔한 위로의 말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기에, 난 이런 위로를 하면 안 되는 사람이기에... 다른 친구들의 댓글에서도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혜 작가는 스스로 추슬렀다.
'암 선고와 함께 6개월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꽂아두었던 무수한 책들을 보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는 생각을 다시 '읽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생에 대한 애착이고 일상 속 나의 모습이다. 나는 그것을 회복해야겠다.
나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p. 51)'

게다가 암은 주혜 작가에게 이제까지 감춰두었던 삶의 이면을 보여주었다.
'밝은 햇살,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 사시사철 다른 모습과 온도로 다가오는 자연의 아름다움, 맛있는 음식, 사랑하는 이들과 아무 걱정 없이 보낼 수 있는 하루하루가 더 이상은 내게 허락되지 않음이, 미래에 남편과 아이들 곁에 내가 함께할 수 없음이 사무치게 서러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은 축복이 확실하다. (p. 211)'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에게 주어진 두 개의 삶을 제시하는 빨간 약, 파란 약처럼, 주혜 작가에게도 암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알약 하나를 꺼내 보였다. 먹겠는지 안 먹겠는지. 알약을 먹으면 주헤 작가 앞에 놓인 여명의 미래를 볼 수 있다. 알약을 먹지 않으면 당연히 미래를 알 수 없다. 알다시피 주혜 작가는 알약을 먹지 않았다.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다. 왜냐고?

'저는 죽는 순간까지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제게 남은 삶의 시간이 얼마만큼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시간을 모두 암에게 내어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p. 13, 프롤로그)'


우리가 이제까지 맞이했던 그 어떤 여름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계절에, 주혜 작가가 맞이했던 그 어떤 시기보다 혹독했던 삶의 한 페이지를 북토크에서 다시 한번 주혜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듣게 되겠지. 그러고 나면 우리들 기억 속에는 여름 무더위가 차지했던 짜증 대신 북토크 후 주고받을 농담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이 여름은 우리들이 주고받았던 그 어떤 농담보다도 유쾌한 농담을 한 계절로 남을 것이다.

해피엔딩,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그럼 지난 1년이라는 주혜 작가의 삶은 주혜 작가 입장에서 멀리서 본 희극일까? 가까이서 본 비극일까. 그냥 생각하기 나름이다. 주혜 작가는 멀리든 가까이든 상관없이 해피엔딩으로 결론짓고 인생을 보기 때문이다.

'저는 이 책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삶은 축복이 맞습니다. 당신이 조금 더 축복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희망 끝에 기적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환우들, 환우의 가족들과 지인들, 그리고 삶에서 작은 희망이라도 찾기를 바라는 분들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도 희망이 가져다주는 기적과 마주할 시간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요.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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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법 -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의 물음표 사용법
정철 지음, 김파카 그림 / 블랙피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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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픈AI CEO 샘 알트먼이 직접 챗GPT의 새로운 모델 'GPT-5'를 공개했다.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는 웹 프로그램 개발을 명령하자 300줄 이상의 코드를 2분여 만에 작성하는 놀라운 수준의 성능을 보여줬다. 할루시네이션 오류도 줄였다며 박사급 전문가를 언제든 활용할 수 있게 됐다고 샘 알트먼은 말했다.


절반은 카피라이터 절반은 작가 정철의 '물음표 사용법'에 관한 '질문 에세이' <사람의 생각법>은 아래 글귀로 시작한다.

'누가 물었다.
문명이 나를 침범하는 걸 어느 선까지 용인해야 할까요?
기억력과 계산력은 문명에게 양보한다.
상상력은 양보하지 않는다.'
박사급 전문가 'GPT-5'에게 상상력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저자는 카피라이터 또는 작가가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이다. 또한 AI가 우리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도 같은 맥락의 대답을 한다. '옳은 질문이 아닌 다른 질문'을 하라.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상상력을 깨운다. 그런가 하면 AI가 내놓는 답을 받아먹는 것에 익숙해지면 질문을 건너뛴다. 생각을 생략한다.
'질문과 사유가 안겨 주는 통찰의 순간과도 영영 멀어지게 된다. (p. 14)'


인상 깊었던,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정철의 '다른 질문'을 살펴보면... 무릎을 탁 치게 하는, AI가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전혀 생각해낼 수 없는 대답을 '절반은 카피라이터 절반은 작가' 정철이 내놓는다.

상상력 백화점을 순례하며 떠오른 질문, "'같다'의 동의어는?"
같은 표정은 무표정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내 표정이 남들과 같다면, 도시의 풍경이 다른 도시와 같다면, 같다면... '같다는 건 없다는 것. 내 표정이 없으면 내 존재도 없다. (p. 25)'

엉뚱한 질문, "1%와 99%는 어떻게 다를까?"
1%는 0%에 99%는 100%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둘 다 100%도 0%도 아니다.
'둘 다 저지를 수 있는 확률이고, 저질러도 되는 확률이고, 저지르기를 무수히 시도한 확률이다. 우리 조상이 확률 99% 이상일 때만 일을 저질렀다면, 너와 나는 오늘도 팬티 하나 입고 정글에서 나무를 타고 있을 것이다. (p. 73)'

무허가 철학관에 가서 한 질문, "손금은 왜 손바닥에 붙어 있을까?"
'운명을 좌우한다는 손금이 요 손바닥에 붙어 있는 건, 내가 만지는 것이 내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야. (p. 105)'

위험한 질문, "꼬리가 길면 누구에게 밟힐까?"
아무도 모르게 반칙을 저질렀다 해도 나는 안다. 꼬리가 길면 나에게 밟힌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초조하다. '동물은 꼬리가 꼬리지만 사람은 초조가 꼬리다. 초조가 길면 밟힌다. (p. 151)'

한여름 퇴근길에 생각난 질문, "지능이 영리할까 본능이 영리할까?"
지능은 숫자에 매달리지만 본능은 수치보다 감각을 믿는다. 비과학적인 느낌과 경험을 믿는 본능은 과학의 한계 정도는 우습게 뛰어넘는다.

고요한 질문, "가장 깊은 상처는 누가 줄까?"
바로 '나'다. 내게 신경을 가장 덜 쓴다. 하물며 내게는 용서나 이해를 구할 생각조차 안 한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고, 받은 상처를 모를뿐더러 내 깊은 곳에서 그 상처가 곪는 것도 '나'는 모른다.

비공인 선생님을 만나 한 질문, "죽는 날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죽음, 나는 죽는다는 사실! '왜냐면, 우리가 하는 걱정 대부분은 내가 영원히 살 거라는 착각이 저지르는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p. 252)'

'절반은 카피라이터 절반은 작가' 정철의 마지막 질문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라는 샘플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 히라야마가 출근길에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노래는?"
이 질문은 낯선 질문이다. 날선 질문, 추억이 하는 질문,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떤 질문을 받고 싶은가.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가. 좋은 질문은 대답을 넘어 대화를 낳는다. (p. 259)'


주입식 교육을 받은 나의 학창 시절은 간혹 질문거리가 생각 나도 질문할 수 없는 근엄한 분위기였다. 그런 교육은 직장 상사에게 하는 질문은 권위에 맞서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질문을 하지 않는다. 꼭 물어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내가 물어보자고 졸라대도 절대 물어보지 않는다. 물어보는 걸 자존심과 연결 짓는다. 그리고 개고생한다.

무엇을 먹을 건지 질문하고 무얼 먹겠다고 대답해야 한다. 머리는 어떻게 자를 건지 질문받고, 결혼하자는 용기가 필요한 질문도 해야 하고. 질문이나 대답이 때론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는 것도 안다. 인생 자체가 질문과 대답으로 채워진다는 걸 알면서도 질문하기를 주저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AI 시대는 '당신은 뭐 하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절반은 카피라이터 절반은 작가' 정철처럼 "질문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살아남는 시대다. '옳은 질문'을 생각하느라 질문하기를 주저할 틈이 없다. 남들과 '다른 질문'으로 삶을 꽉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AI에게 상상력을 빼앗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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