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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메라의 땅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김희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평점 :
'최초로 단 한 가지 동물, 즉 인간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의 주요 동인이 되었다. (pp. 597 백과사전: 인류세)'
우리 행성에서 6차 대멸종이 진행 중이다.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 생물의 다양성 감소 등 대멸종 원인 제공자는 인류세의 주인공 사피엔스다. 과연 사피엔스는 환경 변화에 적응해 대멸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망이 어둡다. 곧 특이점에 도달할 AI와 핵무기가 결합할 경우 그 파괴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3차 세계 대전 몇 년 전, 보안 문제는 인공 지능 시스템에 일임되었어요. 중요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신속하고 믿을 만하다고 여겨졌죠. 하지만 그들에겐 양심도 거리낌도 없었어요. 그들은 프로그램된 대로, 즉 미사일 공격에는 더 파괴적인 다른 미사일로 반격하여 임무를 완수했죠. 3차 세계 대전이 그토록 신속히 진행됐고 더욱이 그토록 파괴적이었던 건 그 때문이에요." (p. 214)'
'이 이야기는 당신이 이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 순간으로부터 정확히 5년 후에 일어난다. (p. 11, 일러두기)'
변신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알리스 카메러는 유전자 조작 기술로 공중을 나는 인간 '에어리얼 Aerial', 땅을 파고들어 가는 인간 '디거 Digger', 헤엄치는 인간 '노틱 Nautic' 세 가지 아종의 새로운 인류 개발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인류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도 생존하기 위해서다.
''키메라'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키마이라 Khimaira에서 왔는데, 이는 염소의 몸통, 사자의 머리, 뱀의 꼬리로 이루어진 그리스 신화 속 피조물을 가리킨다. (p. 423 백과사전: 키메라)'
하지만 프로젝트가 밝혀지자 반대에 부딪히면서 위협까지 받게 된다. 할 수 없이 알리스는 410킬로미터 상공 우주정거장에 머물면서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그사이 지구에서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핵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다.
우여곡절 끝에 지구로 돌아온 알리스는 인간과 박쥐, 두더지, 돌고래, 3형제 혼종 키메라를 탄생시킨다. 세 종의 신인류는 지구에 살아남은 구인류와 어떤 생존 방식을 선택할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어리얼은 공기, 노틱은 물, 디거는 흙, 세 원소에 이은 불에 기초한 인간과 도롱뇽 혼종 '파이어'는 또 구인류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할까.
'"세 종의 신인류를 창조하면서, 나는 구인류와 각기 다른 세 가지 관계를 창조했어. 에어리얼과는 협력 관계, 디거와는 중립적 관계, 노틱과는 파괴의 관계지..." (...) "... 하지만 절 빼놓으셨어요." 악셀이 말한다. "전 네 번째 원소의 대표잖아요. 불 Feu의 F를 더해야죠." (p. 600)'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찾아떠나는 선택보다는 어쩌면 어떤 재난이 닥쳤을 때 공중에서, 땅속에서,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선택이 더 나아 보인다. 그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키메라의 땅>이라는 상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도 봤듯이 신인류가 전쟁을 일으키는 유전자도 종족을 차별하는 유전자도 모두 가지고 있다면? 걱정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되풀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7차 대멸종의 주인공은 혼종 신인류, 키메라가 될 것이다.
인류세를 버리고 인류의 미래를 자연의 선택에 맡기는 건 어떨까? 물론 사피엔스가 욕망을 참아내는 것이 먼저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연은 언제나 다양성으로 생존의 길을 찾아왔으니 최선의 선택임이 분명하다.
2020년 7월 프랑스 국회에 인간 배아 줄기세포 재료로 한 키메라 창조를 허가하는 내용의 법안이 제출됐지만 다행히도 부결됐다고 한다. 아직까지는 과학적 또는 의학적 이익보다 생명 윤리가 중시되지만, 이런 상황이 얼마나 더 갈까?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방법을 사피엔스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갈 것 같지는 않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5년 예언이 너무 이르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결국 10년이든 15년이든 그 이상이든 지구가 키메라의 땅이 될지도... 대멸종을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