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로매니악 1
이우혁 지음 / 반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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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우혁 작가의 『파이로매니악』 은 새로운 책이 아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펴내는 개정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AI 시대로 하루만 지나도 시대가 변하는 이 때 이우혁 작가는 새로운 개정판을 꺼냈다. 기존의 구성을 모두 뒤엎고 가장 최신에 맞는 기술로 업그레이드된 테크노 스릴러 『파이로매니악』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정판이면서도 새로운 책이다. 2026년판 테크노스릴러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이우혁 작가의 시리즈이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파이로매니악'은 무슨 뜻일까? 


Pyro (방화) -Maniac (미치광이, 광) 속칭 피엠(PM) 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드론에 부착된 방화기술로 사람을 공격하는 이 피엠 집단은 세 명, 유영, 민동훈, 토끼928 단 세 명이다. 이 세명은 운전을 하고 동훈은 드론을 조작하고 토끼928은 해커를 하여 적들을 물리친다. 


총3권의 시리즈로 이루어진 이 『파이로매니악』 은 두 부류의 이야기로 나뉘어진다. 

파이로매니악의 멤버 3명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공동의 적을 물리친다. 그리고 그들이 남기는 메시지는 단 하나. 


착한 네가 참아. 

착한 우리도 더는 안 참아. 


그렇다면 이들이 무엇이 착하다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참으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이들을 잡으려고 하는 정의의 검찰 고일문 검사가 있다.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세력에 맞서 외롭게 진실을 밝히려고 애쓰는 고일문 검사는 민동훈이 보낸 드론으로 사건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선다. 


파이로매니악과 고일문 검사의 연합 아닌 연합 VS 돈을 위해 방산시스템을 팔아 해치우는 정체 모를 악의 세력들의 대결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기존 파이로테크닉과 AI를 이용한 방산기술의 대립, 그리고 AI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한들 완전하지 않기에 발생할 수 있는 취약점등을 소설에서는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이 기술을 보면서 최근 있었던 AI 타격 대상 오점 등과 같은 실책등에 대한 위험이 연상되며 결코 소설 속 이야기로만 한정지을 수 없게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작품이라고 전혀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가는 모든 걸 현대 기술에 맞춰 새롭게 만들어냈다. 


1권은 시작일 뿐이라서 많은 떡밥을 던져놓는다. 왜 이 세명이 모여 파이로매니악 테러조직이 되었는지, 그리고 새로운 인공지능 탑재된 기술 및 방산기술단지를 적에게 함부로 노출시키는 정체가 완전히 가려져 있어 배후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사건의 개요가 완전한 베일 속에 가리워진 채 사건이 전개되는 1권은 2권을 읽지 않고는 이 책을 알 수 없게 만들어져있다. 

너무 많은 떡밥이 뿌려진 1권이 2권에서는 어떻게 회수될지 기대를 잔뜩 부풀려 놓은 채 1권을 마무리한 작가와 출판사에게 박수를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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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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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출간된 <이중 하나는 거짓말> 장편소설에 이어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8년만에 출간한 소설집이다. 


총 일곱 편의 단편 중 2022년 김승옥문항상 우수상 수상작인 <홈 파티> 와 2022년 오영수 문학상 수상작인 <좋은 이웃>  등을 포함해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이 소설은 코로나 시절을 배경으로 진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인들의 갑질을 볼 때가 있다. 돈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사용자라는 입장으로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한 소리를 하곤 한다. '내가 돈이 있다면 저러지 않을 텐데.' '돈이 있으면 다 저러는 건가.' 

부자들의 갑질에 분노하며 나는 절대 갑질을 하지 않겠노라고 비유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장담할 수 있을까? 


김애란 소설집에서는 그런 우리들의 질문에 직격타를 날린다. 


'당신은 정말 돈이 있어도, 또는 '갑'의 입장에서 '을'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예'라고 대답할 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묻는다. 과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고 말이다. 


두 번째 단편소설 <숲속 작은 집> 에서 은주는 프리랜서 디자이너이다. 의도치 않았던 프리랜서. 인건비를 줄이려는 사장의 치사한 해고 작전에 사직서를 써야 했다. 기분전환으로 여행을 떠난 부부. 

그들은 숙소에서 매일 청소해주는 여성을 만난다. 늘 상냥하게 웃으며 열심히 청소해 주던 여성이 어느 날부터 청소에 소홀히한다. '돈'의 문제라고 자각한 부부는 팁을 놓아주기 시작하며 다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팁이야 당연한 것으로 치지만 본격적인 문제는 은주가 애지중지했던 기념품 '집' 의 모형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 의심은 당연히 청소일을 해준 여성에게 쏠린다. 사정을 알아볼 이유도 없다. 집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청소해주는 분 밖에 없으니. 주저하지 않고 의심하는 은주 부부는 마지막 떠나는 날 청소하는 분의 딸이 실수로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인사와 미소가 눈빛과 호의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은주는 여성의 행동이 모두 '돈'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은주는 비로소 알게 된다. 모든 걸 '돈'으로 생각했던 사람은 그 여성이 아닌 바로 은주였음을. 

여성의 행동 원인을 '팁'으로 생각하고 그에 섭섭함을 느낀다. 그리고 기념품이 사라졌을 때에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돈'으로 생각한 은주는 비로소 자신 또한 잠시나마 '갑'이 되었을 때 '갑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자본주의의 계급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은주'를 통해 보여준다. 


이 질문은 <좋은 이웃>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자신은 세입자로 그것도 곧 이사를 가야 하는 세입자이다. 윗층에서 집을 구매해 들어와 공사를 시작하는 윗층 부부. 

그들은 공사 안내문을 붙이며 한 마디를 남긴다.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다." 


과연 좋은 이웃이란 뭘까? 주희는 비슷한 나이에 집을 구매한 또래 부부들을 부러워한다. 한편 장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며 시장에서 정육점을 하는 시우를 가엾이 여겨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가정방문으로 공부를 가르쳐준다. 정도 들었고 시우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주희의 선의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난한 줄로만 알았던 시우네가 새 아파트로 이사간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주희는 가정 방문을 더 할 수 없음을 느낀다. 나보다 못한 환경인 줄 알았던 시우네가 더 잘 사는 환경으로 나가는 데서 비춰지는 자괴감이 드러나며 주희는 생각한다. 


'을'의 입장에서 진실을 모른 척 해야 하는 아파트 경비원, 평점을 위해 거친 비바람을 뚫고 서비스까지 주며 평점을 부탁하는 가게 주인,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했지만 공사에 컴플레인을 하는 주희의 전화를 피하는 윗집 주인, 그리고 시우의 상황을 알면서 가정 방문을 더 이상 못 해주는 주희의 모습. 


그 모습 속에 우리는 '좋은 이웃'을 잃고 있고 나 조차도 완벽한 '좋은 이웃'이 되어 줄 수 없다는 현실이 보인다. '좋은 이웃'은 돈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소설은 보여준다. 


슬프게도 '좋은 이웃'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돈의 문제는 이웃과의 관계를 지나 '가족'관계에서도 좌우된다. 

<레몬케이크>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 선주보다 당장 자신의 책방 행사에 엄마와의 만남에 집중하지 못한다. 빨리 엄마를 보내고 이벤트 준비를 해야 하는 기진. 좋은 레몬케이크와 샴페인은 엄마와의 만남이 아닌 책방 행사에 올인하지만 의도치 않은 일로 행사 일은 틀어진다.   모든 게 빠르게 디지털화 되어 가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해지는 엄마 세대. 자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이 시대에 노인들의 우울증은 깊어지고 자녀들은 먹고 사는 생계의 문제에 헤어나오지 못한다. 돈의 문제는 자녀에게도 좋은 자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짐이라는 것이 슬프게 비춰진다. 



책을 읽다보면 신형철 평론가가 왜 김애란 작가를 '사회학자'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느 사회학자보다 문학으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모습을 적확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표제작을 <안녕이라 그랬어>로 정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이 시대에 '안녕' 평안하시라는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경제가 더 힘들어지며 좋은 이웃이 되기 힘든 시대, 그래도 조금이나마 평안하라고, 안녕하다고 말하고 싶은 작가의 바램이라고 생각된다. 


자본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이 시대, 우리 모두 평안하느냐고 묻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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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어떻게 지내요>를 읽는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인 이 소설을 조력 자살, 죽을 권리로 이해한다. 영화는 주로 본문인 친구 마사와 잉그리드의 관계에 주목했으니 소설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죽을 권리, 잘 죽을 권리로만 생각한다면 이 책을 반절만 이해한 게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제목은 '어떻게 지내요'이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의 말.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생을 마무리하는 친구에게도 집중하지만 왜 여기에 전애인을 대비했을까를 고민한다. 


세상에 비관적인 전애인을 왜 끼워넣었을까? 


그건 고통을 끝내고 싶어 조력 자살을 준비하는 친구 마사의 태도와 대비되기 떄문이다. 


먼저 전애인의 태도를 보자. 


"여하튼 확실히 난 이제는 예전처럼 예술이 지닌 구원의 힘을 믿지 않아. 그런 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봐. 난 인간이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완전히 버렸어." 


전애인의 말에는 세상을 향한 어떤 걱정거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든게 끝났다는 비관론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는 지구 위기를 걱정하지만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공감대가 없다. 


반면 친구 마사는 다르다. 


"만사가 끔찍하고 미래에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면 세상을 뜨기가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사라진 이후, 한없이 풍요롭고 한없이 아름다운 세상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어. 그마저 빼앗기면 위안이라고는 없는 거지." 


두 사람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전애인은 모든 게 끝장난 마당에 토론해봤자 필요없다는 입장과 

내가 죽고 나서도 아름다운 세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친구의 입장. 


과연 누가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인가?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서 잉그리드는 전애인에게 대답한다. 



전애인의 말대로 이 세상은 비극이다. 


이미 우리는 비극을 피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를 만들어내고 '손절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 과연 비극을 피할 수 있나? 만약 그게 비극을 피하는 방법이라면 비극은 더 심각한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비극 속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본다. 


황동만은 변은아의 코피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도와줘."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해 코피를 흘리는 변은아. 



지금 우리의 모습은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하는 변은아처럼 혼자서 코피를 흘리고 있는 사회가 아닐까? 


황동만은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도와줘'라고 말하라고 한다. 


도와줘라고 말하는 느낌. 그건 무엇일까? 





구덩이를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30미터 폭을 1미터로 넓혀주어 구덩이를 견디게 해 준다. 


자폭하고 싶어하는 당신을 구해내고자 건져낸 그 단어. 

나를 건져냈습니다. 


비극 속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건 도와줘라는 말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도와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어떻게 지내요"? 가 프랑스어로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뜻이라면 한국어로는 "도와줘"라는 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와줘. 

도와주세요.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나요? 


이 한 마디가 왜 이리 힘들까. 우리는 이 한 마디를 하지 못해 얼마나 홀로 더 많은 코피를 흘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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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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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다보면 어떻게 살지 답이 나오거든요." 

- 드라마 판타스틱 대사 중에서 



몇 년 전, 사전의료연명의향서 를 작성하고 남편에게 통지했다. 이미 발급 끝났으니 만약 내가 불가피한 일이 발생할 경우 연명치료를 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또한 내가 죽는다면 수목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내 결정에 웃으며 말했다. "그건 산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야."  그리고 남편은 그 질문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다. 내 생명인데 왜 남편은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는 걸까. 몸이 아픈 사람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모두 빼앗기게 되는 것일까?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확장판이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말기암으로 조력 자살을 계획하는 친구 마사와 친구의 마지막을 동행하는 잉그리드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메인인 두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하지만 소설은 잉그리드의 전애인의 비관론적 세계론, 그리고 잉그리드의 주위에서 노화와 죽음 등을 바라보는 두 가지 축으로 나뉘어져 있다. 왜 시그리드 누네즈는 두 친구의 이야기 외에도 주위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란히 가져갔을까? 


먼저 이 책을 말할 때 잉그리드의 전애인에 관하여 시작해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대통령 당선, 테크기업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부의 흐름, 전애인의 강의는 과격하다. 어느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애인은 질문을 받지 않으며 이 지옥 같은 삶에 아이를 낳는 것 또한 죄라고 여긴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기후위기는 심각해진다. 개천이 말랐다는 탄식 아래 결혼은 하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 늘어간다. 자신에게 이득이 안 되는 사람은 쉽게 '손절'하는 시대. 노키즈존과 노실버존이 판치다보니 어느 출판사에서 <손절사회>라는 책까지 나왔다. 이미 이 시대는 소설 속 잉그리드의 전애인이 말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질문해야 한다. 비관하고 포기하는 쪽이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인가? 


이 전애인의 비관론에 반대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말기를 살아가는 친구 마사이다. 






실날같은 희망마저 뺴앗기는 순간 우리에게는 아주 작은 위안마저도 사라진다는 사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극적인 시대에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친구와 잉그리드의 관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아간다.  잘 죽고 싶기에 조력 자살을 선택하는 친구. 


사람들이 이 병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영웅 서사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나 봐. 

생존자는 영웅이다. 어린아이라면 슈퍼 영웅이고. 그저 할 일을 하는 의사들까지도 영웅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하는 거야. 그런데 도대체 왜 암이 한 사람의 패기를 판단하는 일종의 시험이 되어야 하는 거지? 


이것이 싸우는 내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사람들도 이해해야 해.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조력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라는 원론적인 말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죽음 조차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걸 부정하는 우리의 형태가 아닐까? 잘 죽고 싶은 소망도 자신의 삶을 잘 결정하고 싶다는 방식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잘 사는 것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잘 죽는 것에 대한 논의는 거부한다는 건 우리가 생의 한 부분만을 생각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은 결국 사와 함께 이어져 생사가 되거늘 우리는 늘 사를 거부한다. 그건 마치 비관론에 휩싸여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잉그리드의 전애인과도 같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얼핏 보면 조력 자살하는 친구와의 동행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은 말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좀 빨리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과 좀 늦게까지 세상에 유예하는 인간의 동행이라고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다만 시기에 차이가 있는 것 뿐이므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인간들끼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건 결국 이 소설의 첫 장이자 제목이기도 한 시몬 베유의 말. "어떻게 지내요?"와 프랑스어 의미인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라는 질문이다. 힘든 이 시대 우리가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건 서로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물으며 함께 견디는 것.  잉그리드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하며 안아주었던 피트니스 강사와 같은 사람만이 이 시대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전애인은 비극적인 결말을 말하는 것에 그친다. 해결책은 없다며 더 나아가길 거부하는 전애인의 한계가 명확한 이유는 오히려 사람의 삶을 더 지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보는 관계일지라도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며 위로해주는 강사와 같은 사람은 비록 비극적인 상황일지라도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인생의 말기를 살아가는 친구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 비록 합법적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설을 잘 죽는 것에 대한 소설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비극적인 시대에 어떻게 살아가며 타인을 대할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잘 죽는 것에 대한 논의도 비록 겁이 날지언정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절망적인 뉴스만이 들려오는 이 때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말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어떻게 지내요?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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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기쁨
멕 메이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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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쥐어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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