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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 질병과 아픔, 이해받지 못하는 불편함에 관하여 ㅣ 그래도봄 플라워 에디션 2
오희승 지음 / 그래도봄 / 202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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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조리원에 들어갔다. 산모들의 천국이라는 조리원에서 나에게 천국은 단 3일뿐이었다. 3일 후, 갑자기 찾아온 복부 통증으로 한끼도 먹지도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다. 통증을 호소할 때마다 간호사는 젖몸살이라고 말했고 참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간호사도 남편도 내게 참으라고만 말했고 나는 고통을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참다 참다 고통이 정점에 달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호소했고 마약성 진통제라도 놓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때가 설연휴였고 나의 울부짖음에 내가 있는 조리원의 본 병원장의 지시하에 종합병원으로 실려갔다. 응급실에서 여러 검사를 한 끝에 나는 장이 꼬여 생긴 질병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만 했다.
왜 나는 나의 투병기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가? 바로 에세이 『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는 그 당시를 떠떠올리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10대때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병의 증세라고 생각하지 못하다가 임신과 출산을 겪고 심해진 후에야 비로소 얻게 된 병명 CMT, 샤르코-마리-투스병을 진단받으며 그 고통을 통과한 기록을 이야기한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환자와 의사 간의 대화는
서로 어긋나는 초고속 독백 같다.
저자는 오랜 고민 끝에 세 번의 인공 관절 수술을 받는다. 수술을 받기 위해 어느 병원이 좋은지 탐색하며 정보를 얻는다. 좋다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의사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하지만 짧은 진료 시간안에서 의사들의 답변은 환자들이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하다. 환자가 100% 의지해야만 하는 관계에서 환자는 모든 걸 감당해야만 한다. 나의 경우, 다행히 좋은 의사를 만났다. 내 담당 교수는 간호사나 전임의보다 더 쉬운 용어로 이야기해서 환자가 쉽게 이야기해줬고 회진 시간 전에 미리 인턴들을 돌게 해서 환자들을 준비시켰다. 회진 시간이 매일 일정했고 회진할 때에도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환자인 나와 대화하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시아버님의 오랜 투병으로 병원 진료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시댁마저도 이런 교수는 흔치 않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와 함께 입원해 있던 다른 환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환자들은 언제 교수가 회진올지 몰라 자리를 쉽게 뜰 수 없었고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회진을 와서도 다른 전임의에게만 이야기할 뿐 환자와는 대화하지 않았다. 자신들끼리 몇 마디가 오간 뒤 인사도 없이 휙 떠나버린 뒤 옆 환자가 물었다.
"의사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질문에 회진의 대상자였던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몰라요. 지들끼리 뭐라고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듣는데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자리임에도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의사들만의 독백으로 끝나버리는 회진은 내가 한 달 이상 입원하며 바라 본 병실의 풍경이었다. 착한 드라마라고 칭찬받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친절한 설명은 정말 드라마에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환자들은 아파서 서비스를 받는 입장임에도 불친절을 감당해야만 했다.
사소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것도 못 하나 싶어서 좌절하고,
못나게 비춰지는 내가 부끄러워서
얼마나 감추고 싶었는지 모른다.
몸의 불편함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끌어안기 위해서는 약함을
나의 정체성의 전체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했다.
저자는 제대로 걷지 못하고 이동 동선이 자유롭지 못했다. 가족이든 간병인이든 누군가의 돌봄은 필수였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신은 어렵게 간신히 해 낸다는 점에서 자괴감에 빠져야 했다. 남편에게, 어머니에게 부담을 준다는 사실부터가 저자를 힘들게 했다. 그 과정은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건강이 타인과 동일하지 않으므로 기준을 낮추어 바라보아야 하는데 남들의 기준으로 바라봄으로 자존감은 회복되기 어려운 건 당연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저자는 자신의 몸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 또한 꼬인 장을 풀고 일시적인 배변 주머니를 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안 된다며 눈물을 터뜨렸다. 장이 회복되는 동안만 차는 거라고 설득했지만 항상 부끄러웠고 외출조차 마음껏 하지 못했다. 직장에서도 말하지 못하고 적게 먹고 활동을 최소화했다. 주위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만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기 연민에서 허우적댔다. 나 또한 내 기준을 너무 높게 잡고 스스로를 감싸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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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질병과 함께 가는 '돌봄'의 문제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손주와 아픈 딸을 함께 돌봐줘야만 했던 친정엄마의 돌봄, 퇴근 후 돌아와 아내를 챙기는 남편의 돌봄, 돌봄 속에서도 환자만이 느끼는 외로움, 돌봄 받는 이와 돌봄을 주는 이의 관계 등을 이야기한다. 남편 역시 지금도 내게 이야기한다. 갓 태어난 쌍둥이 돌보랴, 입원해 있는 나를 돌보랴 쉽지 않았다고. 어머님이 와 계셨지만 매우 힘들었다고 종종 말한다. 하지만 저자가 고통에 함몰되어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남편의 노고를 보지 못했다. 내 고통만이 중요했고 병실에 덩그라니 남겨진 나만 불쌍했다. 돌봄을 받는 이 또한 노력이 필요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적절한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는 환자, 의료진, 돌봄의 대상, 그리고 사회 내에서 적절한 고통의 언어가 있을 때 아픈 사람들이 덜 소외받을 수 있음을 저자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해준다. 나 역시 두 번의 수술을 겪어서인지 저자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의 경우 이 고통의 언어를 찾아가는 데 글쓰기라는 통로를 통해 어렵게 찾아갔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환자들이 힘들지 않게 자신의 언어를 찾아갔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