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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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겪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말한다. '빨리 잊고 이별의 상처를 극복하라고.'

누군가를 하늘로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말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라고.'

세월호와 같이 10년이 지나도 애도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슬픔이 극복해야 할 대상일까?'

슬픔조차도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보여지는 이 시대를 보면서 씁쓸했다. 그 슬픔을 이겨내라는 말은 오히려 우리가 상대에게 깊은 애도를 건너 다음의 강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해 준다.

예소원 작가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지피지기는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을 잘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슬퍼할 수 있는 것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원에 빚을 져서》 에서는 주인공 세 친구가 나온다.

동이, 혜란, 석이.

셋은 대학 시절 캄보디아 봉사활동에서 만난 사이다.

이 세 명의 친구는 동이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상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혜란으로부터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실종 장소는 이들이 봉사활동을 갔던 캄보디아. 동이와 혜란은 그들의 추억의 장소 캄보디아로 가서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학생 삐썻을 만나며 그들의 시절이 다시 소환된다.

《영원에 빚을 져서》 는 우리 시절의 슬픔들이 소환된다. 캄보디아에서 세월호 참사 사건을 듣게 되고 캄보디아 학생 삐섯은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꺼삑섬 사건을 들려준다. 물놀이 축제에서 다리에 끼워 죽은 사람들. 세계 최악의 압사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된 "프놈펜 압사 사건" 이야기를 해 준다.

물에 빠져 배가 침몰한 사건과 다리에 끼워 압사된 죽음.

그 사건을 들으며 세 친구는 죽음이 다르다고 말한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 그런 죽음이 다 있어."

그런 죽음이 다 있냐는 질문.

그 질문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주류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사고나 사건을 접할 때 그 종류를 파악하고 빨리 단정지어버리려는 것. 이태원 참사 사건도 그랬고 세월호 참사 사건도 그렇다.

하지만 슬픔에 결이 다를 수 있을까? 세월호가 침몰한 슬픔도 다리에 끼워 압사된 죽음도 결국 슬픔은 한 종류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를 잃고 떠나보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같고 다름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슬픔을 구분하려 하는가?

동이, 혜란, 석이 세 친구들 중 슬픔에 가장 감정이입이 많이 되며 공감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석'이었다.

그리고 세 친구 중 가장 거리감을 두고 지켜보는 사람이 '동이'였다. 그런데 세 친구 중 가장 힘든 시절을 사는 사람 또한 '동이'이다. 가장 형편이 안 좋고 어머니 오랜 투병 생활로 힘들어한 사람이 동이였다.

왜 작가는 슬픔에 가장 거리감을 두는 '동이'에게 안 좋은 상황을 허락했을까?

동이에게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힘들게 대학에 다니고 캄보디아에서 돌아와서도 홀로 엄마 병간호를 하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가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했다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동이는 혜란의 흔적을 찾으면서 엄마와 함께 있었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




자신은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가늠하려고' 했음을.

상대방의 마음과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상대방의 통증을 '가늠하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가늠하려고 하다보니 슬픔에 기준을 두게 된다.

어떤 슬픔은 빨리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이고 어떤 슬픔은 극복하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종류이다.

그리고 그 정한 기준하에 우리는 슬픔을 대하고 상대방에게 이만해도 되지 않겠느냐며 빨리 일어서라고 독촉한다.

그 기준과 독촉 속에 슬픔의 당사자들은 올바른 슬픔을 해내지 못한다.

그 기준 속에 우리는 슬픔의 당사자들을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멀리하게 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

지나간 상처를 복기하는 건 쉽지 않다. 세월호 사건도, 5.18 사건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모두 그 시절은 고통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그 시절의 기억을 추적하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바로 마음 떄문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건너보며 그 고통 속에 그럼에도 살아보자고 다짐하며 위로하는 마음들. 그 마음들이 사라져간다. 슬픔을 빨리 잊어야만 하고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우리가 상대방을 살필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마음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제 예소원 작가는 가장 큰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건너보고 살펴보는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슬픔을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슬픔을 믿어야 한다는 역설.

처량하고 처절하고 절실한 것들을 믿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견디며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들린다.

슬픔이 없고 기쁨만 있는 사회는 우리 사회의 아픔을 온전히 포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을 배척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슬픔을 견디어내는 과정 속에서 '건너보고 살펴보며 다짐하는 마음들'을 가질 수 있다.

제주 4.3사건, 광주 5.18, 세월호 참사, 이태원 압사 사건.

수많은 비극이 계속된다. 없으면 좋겠지만 또 언제 우리에게 이런 슬픔이 찾아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많은 비극 속에서도 우리는 아직도 슬픔의 힘을 믿지 못하기에 이해하기보다 가늠하고 판단하려고만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슬픔을 겪어야 이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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