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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평점 :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님과 품격 있는 인터뷰이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의 김지수 기자가 만났다.
마지막 인터뷰를 하겠다면 김지수 기자와 하겠다던 이어령 선생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제목 그대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마치 한국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의 이 책에서 생의 마지막을 앞둔 거장이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게 나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야.
그게 작가라네. 지난번에도 얘기했네만,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자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자신의 삶과 고통의 관찰자가 된다. 그리고 그 관찰의 여정을 글로 기록한다. 고통에 대해새 쓰고 죽음에 대해 쓴다. 자신의 고통을 글로 써 내려간다는 것. 죽음을 쓴다는 건 자기 위로가 아니다. 고통 또한선생님에게 다가온 삶이니 받아들이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끝까지 살아가겠다는 삶의 태도이다.
시대의 지성이라는 칭호답게 문명론자이며 운명 개척론자같지만 선생님은 의외로 운명론자임을 말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운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인간의 행운과 불운은 예정되어있음을 말한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현자들이 정해진 운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지혜가 출발했다는 말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으니 이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고 타고난 팔자에 인생을 맡기고
자기 삶의 운전대를 놓겠나?
아니 될 말일세.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선생님의 글을 보며 나는 나를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여러 가지를 시도해도 결국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도 갑작스런 집안의 대소사가 일어나 이루고자 하고 싶은 성과를 못 미췄을 때 억울함과 분통함이 내 삶을 지배할 때 나는 내 힘으로 안 되는게 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노력하면 잘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 되는 게있다는 걸 받아들일 때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아이들 문제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지만 아이들의 성향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 사회성이 부족해 심리상담을 받는 선생님께 이야기할 때마다 선생님은 말한다. 그게 아이의 성향이라고. 성격이라고. 그건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이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힘들어진다. 아이에게도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게 양육의 시작이 아닐까.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메이비 (Maybe). 우리말로 하면 '어쩌면'이라는 뜻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지만 가능성을 내포하는 이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알 수 없기에 일단 저질러 볼 수 있게 하는 것. '어쩌면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안 될 수도 있어.' '어쩌면 반전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이 메이비가 주는 가능성에 사람들은 모험하고 방황할 수 있다. 팔자는 못 바꾼다며 또는 신념이 대나무처럼 굳은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은 일어나지 않는다. 끝없이 방황하고 모험하라며 그래서 인생 말기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모험한다는 선생님의 글은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로 들려온다.
시대의 한 어른이 이렇게 읽는 이를 위로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보다 너무 너무 좋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대한 아쉬움에도 공감이 되고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부분 또한 매우 좋다. 이제 2021년도 달력 한 페이지만 남은 이 시기라서 그럴까. 문장 하나하나 놓치기 아까운 글들이 많아 필사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책이다. 연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이 책 하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