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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작가 10주기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0년 12월
평점 :

박완서 작가님의 명성에 비해 작가님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다만 그 분의 전작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과 『박완서의 말』을 통해 6.25를 겪은 어린 시절의 공포, 다소 늦은 마흔의 나이에 작품 활동을 하며 끊임없이 활동을 해 나간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내가 본 박완서 작가님의 모습은 소박함 그 자체였다. 작가로서의 허례허식없이, 작품에 대한 어떤 젠체가 아닌 평범한 아주머니이자 할머니였다.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는 박완서 작가님 에세이 결정판이라고 불리우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작품 세계 너머 작가님의 일상과 생각이 35편의 대표작에 투영되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작가님의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한다.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32p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가 들면 머리가 무거워진다고. 그래서 꼰대가 된다고. '라떼는 말이야'를 읊으며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박완서 작가는 나이가 들며 여러 가지 이유로 거지에게 돈을 주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거지에게 돈을 주면 거지 뒤에 있는 배후세력에게 주는 거라는 이유로 적선을 거부하며 거지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쌓여 가는 경험만큼 비례하는 사라져가는 인간성에 자신 또한 한 부분을 담당해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서 또 다짐하고 다시 다짐한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생각한다. 살아간다는 건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더욱 겸손해야 하고 더욱 배워야 하며 더욱 상대방을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박완서 작가님의 글에 손주를 향한 사랑이 듬뿍 배어난다. 손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주고 싶어 전화했건만 요구가 까다로운 손주의 요구에 "산타 할머니도 못 해 먹을 노릇이었다"고 말하는 작가님의 유머와 손주가 훗날 자신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해도 이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작가님의 글 속에는 작가 박완서가 아닌 할머니 박완서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박완서 작가님을 더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작가님처럼 소박하고 평범한 작가가 또 있을까.
나는 경우 바른 어머니만은 우리가 왜 싸웠나와 잘잘못에 대해 바르게 알고 싶어 하실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설명은 집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계집애가 그렇게 사나워서 무엇에 쓰냐는 걱정만 하셨다.
여자라는 게 모든 잘잘못 이전의 더 큰 잘못이 된다는 걸 나는 이해할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저지른 잘못이 아닌 태어난 잘못에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해방된 여성이란 말조차 진부하게 들릴만큼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오늘날, 내가 내 딸에게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p
일제 시대를 살던 작가님의 어린 시절, 자신에게 신여성이 되라며 조부모님의 거센 반대를 뚫고 자신을 서울로 데리고 와 교육시킨 어머니건만 남자 아이와의 싸움에서 어머니는 여자인 저자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잘못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가 사나우면 팔자가 드세다며 고분고분할 것을 요구한다.
아무리 세월이 변했고 여성부가 세워지고 여성의 권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는 여전히 견고하다. 지금도 이리 힘든데 작가님이 살던 일제 시대는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 역시 어린 시절부터 성차별에 노출되었고 교육과 직업도 중요되지만 결혼 후 희생도 강요받는 이율배반적인 여성의 삶을 자신과 자신의 딸을 통해 반복되는 현실을 지켜보며 착찹해한다. 내 자식에게는 이런 일을 안 겪게 해 주어야지 하면서도 결국 자신 역시 딸에게 비슷한 모순을 겪고 있는 작가의 고민은 작가만의 고민이 아닌 이 모든 한국 여성의 고민이었다.
남성은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만의 되풀이되는 고민에 작가는 씁쓸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이 사회가 여성들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달라져 가는 것이라고 여성들을 위로한다.비록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기조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며 다독이며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저자는 가장 소중한 시기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이후가 아닌 그 이후 홀로 습작을 쓰며 노력했을 때라고 이야기한다. 밤잠을 설치며 습작을 하며 노력했던 때가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믿는다. 그때의 경험, 열심히 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며 매번 작가의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허튼소리는 없는지, 조금이라도 거짓이 없는지, 이 글이 최선인지 묻고 또 묻는다. 이 글쓰기의 태도에 작가의 삶이 돋보인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반성을 하며 주변의 인물을 엄마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본 따뜻한 시선이 바로 글쓰기에 투영되어 있음을 알게 해준다.
삶이 글이 되고 삶의 태도가 글쓰기의 태도에 투영되어 더욱 빛을 발함을..
박완서 작가의 글은 소박하다. 그래서 더욱 친근하고 그립다. 마치 저자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이야기로 박완서 작가를 위로해 준 것처럼 자신 또한 자신의 이야기로 위로해주고자 하는 진심이 읽는 이를 공감하게 하고 위로하게 한다.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은 읽고 또 읽고 싶은 글이다. 하얀 공책에 작가의 글로 가득 필사하고 싶은 글이다. 그 글을 읽고 필사하다보면 나 또한 이렇게 겸손하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