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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ㅣ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평점 :

훌륭한 작품임에도 화제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작품이 있다. 화제와 논란은 작품성을 가리고 독자들에게 읽힐 기회를 잃게 된다. 특히 보수적인 독자들에게 에로티시즘 문학은 아직까지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논란에 묻혀 제대로 읽히지 못했던 에로티시즘 고전들을 모은 펭귄클래식은 논란에 가리워진 작품성을 밝히고 느낄 수 있도록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세트》를 출간하였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채털리 부인 이름을 들어왔다. 하지만 이 책을 펴볼 용기는 들지 않았다. 외설적이고 과감한 성행위의 묘사에 이 책은 내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 책에 대한 어느 정보도 잘 알지 못한 상태로 주변의 평판에 따라 읽기도 전에 이 책을 거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단하는 내가 너무 거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우선 읽고나서 판단을 하자고 생각했고 마침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세트 출간소식을 들었고 감사하게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우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D.H. 로렌스의 소설로 최초 집필부터 탈고까지 총 3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외설성에 대한 법적 논쟁으로 문학계에 뜨거운 감자였던 이 소설은 작품성이 외설성이라는 화제에 가려진 비운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펭귄클래식의 문학의 차별성은 뭐니뭐니해도 작품 이해를 위한 풍부한 해설을 담은 서문이라 할 수 있다. 작품배경은 물론이고 D.H.로렌스의 부부생활 및 작품 이해를 위한 설명이 수록되어 작품에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로렌스가 성 개혁 운동가인 저자의 이력이 이 에로티시즘의 고전 『채털리 부인의 연인』 출간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 사회, 탄광산업지대 테버셜이다. 소설 속 채털리 부인의 이름은 콘스탄스이며 클리퍼드 채털리경과 결혼하여 채털리 부인이 되었다. 소설은 초반 주인공 콘스탄스와 언니 힐다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지만 채털리 경과 결혼하며 자신 본인이 아닌 채털리 부인의 삶을 살게 된다.
남편 클리퍼드는 전쟁에 참여해 하반신불구가 되어 돌아오고 클리퍼드와 코니 (콘스탄스의 애칭)는 클리퍼드의 고향인 랙비로 돌아온다. 성관계도 어렵고 글 쓰는 남편을 도우며 살아가는 코니는 마음이 공허함을 느낀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놀라운 건 비록 남편이 하반신불구이지만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던 코니의 마음을 심적으로 잘 표현해내는 데 있다. 그 당시 영국 귀족들의 배타적인 우월감, 남편의 보호자로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코니의 마음, 남자들의 대화에 참여하는 걸 꺼리는 분위기 등등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코니의 마음상태를 코니의 아버지는 단번에 알아차린다.
"코니야, 네가 주어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과부로 지내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72p
1차 세계대전 직후 사회상을 살펴볼 때 코니 아버지 맬컴 경의 조언은 파격적이다. 특히 남성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로렌스의 성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형식적인 생활. 코니가 아닌 채털리 부인의 삶을 사는 그녀에게 남편 클리퍼드는 자신의 가문을 잇기 위해서라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아도 된다는 말을 한다. 코니의 의도와 관계없이 가문을 위한 클리퍼드의 생각은 코니를 더욱 외롭게 한다.
불쌍한 클리퍼드,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는 더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이었다.
이 모든 일은 전체적인 파국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의 탓이 아닐까?
따스함이 이처럼 부족한 것, 좀 더 꾸밈없고 따스한 육체적 접촉이 없는 것,
이것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175p
발기 부전의 삶을 살아야 하는 클리퍼드의 삶을 생각해본다. 지위와 명성이 있지만 정작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잃어버린 그는 수치스러울 것이다. 걷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더욱 성공하고자 글을 써내려가며 평판에 집착했다. 작가로서의 성공에 코니가 훌륭한 도우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클리퍼드는 코니와의 정신적인 삶이 행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소설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정신적인 행복이 과연 부부생활의 불완전을 채워줄 수 있는가?
스물일곱밖에 되지 않았지만 남편의 도우미 역할에 집중되고 여자로서의 삶이 없는 코니는 거울을 보며 좌절한다. 작가로서의 평판을 다지고 있는 클리퍼드의 삶과 다르게 코니는 그의 도우미 역할을 하느라 어느새 생기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클리퍼드는 자신의 성공이 코니의 행복이리라 믿는다. 이 얼마나 가혹한 판단인가.
클리퍼드의 도우미 생활에 지쳐 있던 코니가 마이클리스 희곡작가를 만나 외도를 하지만 그도 코니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한다. 특히 성생활에서 누구의 욕구가 채워져야 하는가를 묻는다. 남성과 여성의 욕구 충족 시기가 다른만큼 여성의 욕구를 만족시킬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는 사실에 마이클리스는 불쾌해한다. 함께 행복해야 할 성생활이 남성 위주의 성생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 소설은 말해준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영국 지식인 사회의 인물이 클리퍼드라면 사냥터지기인 멜로즈는 대비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신분상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나가는 멜로즈의 특성과 그와 함께하는 새생명의 동물들이 코니에게 새로운 환희를 가져다준다. 클리퍼드의 삶은 경직되며 갇혀 있는 듯하지만 멜로즈의 삶은 그야말로 역동적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코니를 원하며 아낌없는 구애를 하는 멜로즈는 코니의 외로웠던 마음을 채워준다. 클리퍼드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접촉, 마이클리스와의 외도에서 판단받아야만 했던 성생활의 불완전함이 이 멜로즈와의 관계에서 다소 해소가 되는 것이리라.
『채털리 부인의 연인』는 에로티시즘의 고전답게 외설성에 대한 표현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성행위는 코니의 심리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임을 알 수 있다. 공허하고 형식적인 관계, 한쪽에만 치우친 성생활 등은 한 쪽만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되어야 한다. 따스함, 친밀한 접촉 등을 그리워했던 코니의 마음은 부부 관계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에게 따스함과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걸 이 소설은 말해주는 듯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논란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판단이 아닐까. 그 너머에 가려진 의미를 바로보지 못하고 외설성이라는 하나의 논란의 대상으로 작품을 포장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작품을 이해할 올바른 해설로 읽게 도와준다면 더 이상의 논란은 없을 듯하다. 펭귄클래식의 차별화된 서문과 함께 이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