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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내가 허지웅이란 사람을 알게 된 건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이였다. 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처음 만난 그는 신동엽 못지 않은 입담과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프로그램 종영 후 '미운오리새끼'에서 본 그의 모습 또한 자유였고 촛불집회 때 어머니와 함께 촛불을 든 사진을 보며 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패기가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강할 것 같아 보이던 그의 투병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팬들에게도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답게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출간하였다.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쪄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사람들이 불행을 마주했을 때 주로 나타나는 반응은 "왜 나야?"라는 질문이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허락된 거지? 왜 나지? 자신은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 고통을 허락한 신을 원망하곤 한다. 한바탕 원망을 쏟아낸 후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고통을 견뎌나간다. 저자는 자신에게 닥친 이 불행 속에 어떤 원망이나 억울함 대신 현실을 내려놓음을 택한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정의하기보다 받아들임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현재 투병 중이신 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을 위해 헌신했건만 자신에게 닥친 이 불행을 엄마는 1년이 넘도록 과거를 반추해내며 우리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신다.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시는 엄마의 원망 속에 엄마의 고통은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한다. 이 글을 엄마에게 보여줄 순 없지만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로 생각나는 글귀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한 가지 결론이 자신을 휘감는다. 죽을 수도 있다. 그 결론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된다. 그 결론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결론이 우리의 삶을 짓누른다. 저자는 자신이 오래 전에 끄적거린 이 한 문장이 엄청난 고통 앞에 부딪힌 그의 병 앞에 이 글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닫는다. 매일 밤 천장과의 사투를 하는 그의 증상 속에 그 역시 죽음이라는 결론에만 사로 잡혔다. 죽음이라는 결론을 뒤로 하고 살겠다는 결심으로 바뀌고 난 후, 그리고 사소한 결심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간 후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는 앞서 말한 고통을 인정하고 피해자라고 규정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견뎌내겠다는 그의 태도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저자를 처음 보았을 때 느껴졌던 패기와 자유분방함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저자의 가족 사정이야 잘 모르지만 대학생 시절 아버지께 눈물을 흘리며 등록금을 내 달라며 도움을 요청했건만 '등록금을 줄 수 없다'는 단호한 한 마디에 홀로 버티어 나가겠다고 결심했던 그의 이야기는 왜 그가 그토록 강인한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과거가 만들어낸 보호막이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게 되었음을 저자는 고백한다.
그는 투병 생활 동안 홀로 고통을 견디는 걸 택한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 버틴다는 것이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비로소 느낀다. 혼자 버틸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동지가 필요한 영역이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그가 완치 후 자신과 비슷한 시절을 겪는 청년들이 똑같은 시행착오를 견디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세상을 바꾸겠다는 패기가 아닌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겠다고 하였음에도 그의 세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바뀌지 않았음을 용산 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다룬 평론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대규모 예배를 강행한 교회들의 선의 아닌 선의를 말하는 그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려는 정치권의 행태, 자신들이 말하는 선의에 갇혀 정부당국의 권고에도 예배를 드리는 그들의 모습 등을 보며 그는 침묵 보다 발언을 택한다. 그의 글을 보며 생각한다.
'아! 허지웅은 허지웅이구나! 비록 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고 했지만 그 의미가 침묵이나 타협이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구나'
불행에 잠식되는 것보다 불행을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고통을 엄마의 투병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것을 너머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 결심과 변화를 이 책을 통해 고백한다.
읽기 전까지만 해도 《살고 싶다는 농담》라는 제목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하지만 읽은 후 나는 이건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 가장 허지웅다운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제목 안에 그의 삶에 대한 인정과 결심이 돋보였다.
고통의 문을 통과한 그가 언제 또 재발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으면서도 함께 버티어 나가자고 말하는 그의 다짐이 눈부시게 다가온다. 《살고 싶다는 농담》 은 자조의 농담이 아니였다. 오늘도 고통을 견디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