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0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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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건 '삶'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있는 한 끝까지 견뎌내야 하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지만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아가는 인생. 살아가는 동안 인생은 점점 차가워진다. 뜨거웠던 혈기가 점차 식어가고 마지막 싸늘한 시신이 되기까지 우리는 차가워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인생의 차가운 면들을 가장 깊게 들여다보는 소설가라면 나는 감히 2018년 작고한 故 정미경 작가를 말하고 싶다. 담담한 듯 그리면서도 인생의 어두운 면까지 어떤 감정의 개입없이 그 사실 날 것 그대로의 면을 보여주는 정미경 작가야말로 우리에게 인생의 면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는 더 이상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없지만 그야말로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민음사의 '오늘의 작가 총서'로 재단장해 출간되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표제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비롯해 <호텔 유로, 1203>, <성스러운 봄>, <비소 여인>, <나릿빛 사진의 추억>,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등 여섯 편의 단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남편이자 소설가인 김주현 작가의 사망 후 딸과 함께 살아가는 유선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남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남편을 잃고 난 후 계속되는 유선에 초점을 맞춘다. 도서관 사서와 과외로 살아가는 유선에게 한 출판사 대표가 알려지지 않은 남편의 유작을 출간하고 싶다며 제의한다.

마지못해 남편의 컴퓨터를 살펴보던 유선은 남편이 일기 형식으로 쓴 문서를 발견한다.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남편의 죽음의 원인조차 알 수 없었던 유선이었기에 다른 여자와의 대화가 담긴 이 글은 유선의 영혼을 좀먹는다.

알 수 없는 원인의 가려움이 그녀를 잠식하며 이 글을 생각할수록 가려움의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최근 스트레스를 심하게 겪은 일이 있냐는 의사의 반응에 유선은 강하고 단호하게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한다.

소설은 유선이 결국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편의 글에 잠식된 듯하다. 그 잠식된 듯한 삶에서도 유선은 과외를 이뤄나가고 자신과 함께 홀로 남겨진 딸을 챙기고 사서와 과외 일을 해 나간다. 미칠 것 같은 마음과 반대로 그녀의 표면은 언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작가의 서늘함이 가장 강하게 발현되는 때는 유선이 출판사 대표에게 전화해 남편이 남겨 놓은 어떤 글도 없다고 통화하는 마지막에서이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그 글을 없던 것으로 정의하고 죽은 남편을 향해 사람들에게 당신은 끝까지 나의 연인으로 남아있으라는 그녀의 말은 이 모든 걸 감당하고 살아가겠다는 그녀의 다짐으로 들린다.


당신은 내 속에서, 언제까지나, 마지막 보여 주었던 그 모습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 내는 게 인간이더라.


여섯 편의 단편 중 인생의 고통에 대해 가장 서늘한 작품은 <성스러운 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치병에 걸린 딸의 병원비로 두 개의 보험설계사 일을 하며 동분서주하는 나는 대학교 시절 교양수업을 들었던 은사의 차 사고에 대한 보험금 청구 처리를 하기 위해 연구실을 방문한다.

보험금을 지급받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는 교수와 피해자의 실수로 몰아가며 지급하지 않으려고 교수를 극한의 상황에 몰아치는 이 상황은 주인공이 딸의 병원비를 추궁하는 의사의 무미건조함과 어떻게든 딸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빚을 지며 살아가다 결국 딸의 병원비를 포기하며 죽음에 내몰리게 된 딸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자신이 보험설계사로서 대학 은사를 궁지로 몰아가고 은사의 숨겨진 비밀을 들춰내며 고통으로 내몰릴수록 주인공 나가 애써 묻어두고 있던 자신의 고통 또한 선명해진다. 애써 고통을 감당해냈지만 남는 건 아이를 포기했다는 아내의 냉소와 침묵 그리고 생활고 속에 고통을 느낄 수조차 없었던 나의 고통을 통해 인생의 잔인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치부를 들켜버린 은사, 돈 때문에 아이의 치료를 중단한 나, 고통의 무게는 다르지만 끝까지 그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무게라는 사실이 끝내 주인공을 울게 한다.


희망은 있는 겁니까?

이건, 질문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저희도 보호자에게 물어보아야 하지만,

이게 질문이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질문이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어딘가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걸 말하겠지요.

이럴 땐 의사나 보호자나 질문이 아닐 딜레마에 부딪치는 거죠.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인생에서 질문조차 될 수 없는 고통. 어떤 답도 있을 수 없다는 게 고통이 주는 극한점이 아닐까.

그 정답 없는 삶 속에서 매번 극단의 선택을 해야 하며 감당해야 하는 인생. 고통을 감당해냈건만 끝내 돌아온 건 또 다른 고통 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삶이 완벽하다는 걸 가장 늦게 깨달았을 때는 생명을 포기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딸의 카테터를 뽑아 버린 순간 깨닫게 되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 인생은 끝까지 고통을 안겨준다.


이 단편집에서의 인물들은 모두 힘든 상황을 살아간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뒤로 하고 자신에게 명품백을 사주기 위해 호텔로 향하는 나, 삶에 대한 적의와 냉소로 가득찬 연인 윤이 주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비소 연인, 떠들썩하고 인정 많은 동네이지만 끝내 치정살인으로 귀결되고 부유한 연인 윤조를 포기하지 못하는 나 등등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가 이 소설에서 그려진다. 놀랍다면 이들에게 동정이라기보다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며 담담하게 말하는 저자의 내러티브가 이야기 속에 스며드는 듯하다.


고통을 마주하고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는 삶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소설 속에 나의 모습을 투시해본다. 나의 고통과 내 삶의 무게를 대조해본다. 동네 뒷골목의 사람들을 향한 그대로의 모습을 찍으며 행복해하던 승우가 끝내 포기하고 인생의 화려한 모습 결혼식의 사진사로 남기로 했다는 승우의 결심처럼 우리의 인생 또한 행복했던 때를 복기하며 그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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