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아갑니다
박영희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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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집을 읽기 전에는 항상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진실들을 또렷이 알게 되는 게 두렵고 그 진실의 파편들이 곧 하나의 그림처럼 맞춰지면 어느 새 내 마음은 무거워지곤 한다. 격월간지 <인권>에서 기재된 '길에서 만난 세상' 에서 17명을 인터뷰한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그래도, 살아갑니다》는 제목부터 내게 무겁게 다가온 책이었다. 과연 이들의 이야기가 어떤 무게로 다가올 지 두려웠다.

《그래도, 살아갑니다》에는 17가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카지노 도박 중독자, 진주의료원, 기간제 교사, 노령연금 수급자 등등.. 모두 이 사회의 약자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삶을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 각자의 고달픈 삶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들에 대한 내 느낌을 우선 말한다면 자본주의라는 그늘 하에, 또는 기술 문명이라는 이름 하에 한순간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하겠다.

자본주의는 이 사회를 소비주의와 효용성 위주로 만들었다. 정규직이 사라지고 효용성을 위한 외주화가 들어서고 교육마저도 살아가는 데 근본이 되는 인문학은 통폐합되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과만 육성하기에 바쁘다. 이 자본주의는 사회의 약자들을 효용성 없는 인간으로 구분지었고 약자들은 더 깊은 그늘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기술 발달 또한 사회의 소외감을 극대화한다. 카풀 언젠가 한 택시 기사의 분신자살이 있었다. 카플 반대를 외치며 극단적 선택을 한 이 죽음 또한 기술 발달의 명암을 드러내준다. 《그래도, 살아갑니다》에는 이 자본주의와 기술 발달에 소외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하이패스를 홍보하며 운전자들의 갑질과 도로공사의 압박을 견디며 묵묵히 견뎌나간다. 순간의 실수로 도박의 늪에 빠진 카지노 도박 중독자들 또한 자살의 위협과 싸워 나가며 하루를 버텨나간다. 이제는 너무 흔한 일이 되어버린 아파트 경비원들을 향한 갑질은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특히 은행에서는 번호표를 뽑고 얌전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왜 톨게이트에서는 잠시도 못 기다리며 화부터 내느냐고, 의사 앞에서는 고분고분한 환자가 간호사들에게는 왜 반말을 일삼으며 화를 내느냐고 그들은 토로한다.

갑질이 일상화된 사회. 단지 이 직종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하는 이 사회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다.



사회에서는 성공을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며 언론에서 성공한 이들의 성공스토리가 소개되고 책이 출간된다. 카지노 도박 중독자를 사회의 문제가 아닌 한 개인의 문제로만 보며 그들을 나몰라라 하는 이 사회는 우리가 그들을 끝까지 인간으로 보고 있나를 질문하게 한다. 도박을 허용하는 사회의 시스템을 개선해나가기는 커녕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그들을 외면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문제일까. 도박은 못 끊는다며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며 그들을 내모는게 과연 이 사회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이 카지노로 도박을 조장하는 이 사회가 문제일까? 우리는 너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노령연금 수급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다. 건강도 문제지만 가장 큰 외로움이 깊게 배어 있는 노인분들이 노령 연금으로 간신히 생활해가는 모습은 매번 전화만을 기다리며 쓸쓸해 하시는 부모님을 연상케했다.

마침 남편과 대화 중 정규직으로 전환된 톨게이트 수납원들이 잡초 제거일을 하고 있다는 기사 이야기를 했다. 이건 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내게 남편은 하이패스가 이미 대중화되었는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며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반론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남편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함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언젠가 카풀 반대를 외치며 극단적 죽음을 선택한 택시 기사 소식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이 얼마나 그들을 사회의 가장자리로 소외시키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그들의 상황에 대한 배려가 있었나?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하기보다 함께 생존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 보는 것이 정답 아닐까? 사람이 우선인 사회는 어쩔 수 없다는 변명보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주는 사회가 아닐까?

《그래도, 살아갑니다》라는 제목에는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이 배어있다. 마지못해 살아가는 삶.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제목이 마음이 아프다. 서로가 손을 잡아주며 "그래도 살아갑니다"라는 말을 "함께라서 그래서 살아갑니다"로 바꿔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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