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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을 쏘았다
호레이스 맥코이 지음, 송예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0년 6월
평점 :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저자 호레이스 맥코이가 샌타모니카에서 열린 마라톤 댄스 대회의 경비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이다. 영화화 되기도 했던 이 소설은 화려하해상 유원지의 무도회장에서 열리는 10,000 달러의 상금이 주어지는 마라톤 댄스 대회가 주 배경이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로버트가 법정에서 글로리아를 총으로 쏘았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선처를 부탁하는 그에게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부분과 함께 그들이 처음 만남부터 마지막까지의 기억이 펼쳐진다.
영화감독 지망생인 로버트는 유명한 폰 스턴버그 감독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자리를 얻기 위해 스튜디오로 가지만
거절당한다. 그 곳에서 영화배우 지망생인 글로리아를 만나게 되고 글로리아는 로버트에게 우승 상금 10,000달러가 주어지는 마라톤 댄스 대회에 참가하자고 제안한다.
마라톤 댄스 대회. 144쌍의 남녀가 대회에 참가하고1시간 50분 동안 춤추고 10분 동안만 쉴 수 있는 대회로 이 10분 이외에 잠시라도 몸을 쉬면 탈락하는 대회이다. 참가 첫 주는 계속 춤을 춰야 하고 그 후부터는 잠시라도 몸을 쉬어서는 안 된다. 이 대회의 스폰서는 많은 관람객을 모으기 위해 참가자들에게 돌발 경기로 관객의 흥미를 끌기도 하는 등 이 대회를 홍보하기에 전념한다. 인기 있는 참가자들은 스폰서의 후원 아래 제품을 받기도 하고 이 대회에 찾아오는 영화감독 및 유명인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 이 쉴 새 없는 마라톤 대회에서 로버트와 글로리아 그리고 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그려진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에서 다른 인물들에 비해 눈에 띄는 인물은 여주인공인 글로리아이다. 그녀가 예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다. 로버트가 매번 글로리아에게 지적하는 그녀의 비관주의가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매번 죽음을 사모하지만 무서워서 죽음을 택하지 못하는 글로리아는 말 끝마다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불평한다.
"사는 게 지긋지긋한데 죽기는 무섭고..."라며 푸념하는 그녀에게 로버트는 질색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죽지 못해 사는 삶. 어려서부터 친척의 학대와 가난에 찌들려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떤 희망이라곤 조금도 없이 불행에 중독된 듯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의 푸념들 중 놀라운 건 바로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많이 듣고 있는 불만들이라는 점이다.
"키울 돈도 없으면서 뭐하러 애를 낳아요?"
"말이 돼요? 저 여자 나이면 집구석에서 손주 기저귀나 갈고 있어야죠. 세상에, 저렇게까지 오래 살까 봐 무섭네요."
"가면 갈수록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에요."
글로리아의 냉소적인 말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건 지금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맘충이라는 단어를 거리낌업이 쓰고 어르신들을 비하하며 무의미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글로리아의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다.
1930년, 미국 대공황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2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놀라울만치 흡사하다.
이는 글로리아 뿐만이 아니다. 이 마라톤 댄스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또한 우승 하나만을 향해 달려나간다.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고 있지만 그들은 동료라기보다 자기에게 필요한 존재일 뿐이다. 대회의 흥행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주최측의 돌발 경기에 응하는 그들은 관람객들의 이목 속에 자신들을 소진해 나간다. 돈과 흥행을 위해서라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은 참가자들과 대회 주관자들의 모습은 최근 우리 사회에 논란이 일고 있는 리얼리티쇼의 악마의 편집을 떠올리게 한다. 쇼를 위해서라면 개연성 따위는 없이 더 자극적인 이슈를 만들어내는 현대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글로리아가 더없이 냉소적이 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마라톤 댄스 대회는 냉소와 이기심이 날뛰는 사회의 축소판이였다. 로버트와 글로리아 그리고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이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었고 이 소설이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음을 저자는 매우 설득력있게보여준다. 그러하기에. 때로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기도 할 만큼 극단적인 비관론에 젖어 있는 글로리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두껍지 않은 소설이지만 매우 빠르게 읽힌다. 이 소설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 과연 그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묻는다. 그 질문 앞에 현재의 나의 모습을 비춰 보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