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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평점 :

예전 문근영이 출연했던 <바람의 화원>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여성의 신분으로 화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남장을 하여 화원에 들어가 활약했던 드라마였다. 남장을 한 여주인공과 그 여주인공을 돕는 남주인공의 역할을 보며 매혹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자라서 자신의 재능을 펼 수 없었던 이야기는 단지 조선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동양보다 더 빨리 여성들의 인권이 진보한 서양 역시 여성들에게는 화가의 꿈은 그들에게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싸우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여성 화가들은 늘 존재해왔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의 저자 김선지씨는 주로 미술사에서 이름이 누락된 여성미술가들과 그들 앞에 놓인 편견과 차별을 꼬집은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을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해 2019년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연재물이 바로 이 책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으로 출간되었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은 3부로 이어진다. 1부에서는 억압적인 가부장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펴낸 여성화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교육의 길이 제한되고 가정생활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15-16세기 화가를 아버지로 두거나 또는 부유한 부모 밑에서만 여성들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설사 배운다 하더라도 인체 데생 교육은 제외되었고 역사화, 종교화 등의 그림은 넘볼 수 없었다.
1부는 주로 아버지에 의해 궁중화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좌절된 마리에타 로부스티, 딸의 그림을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여긴 아버지에 의해 고통받은 엘리자베타 시라니, 남성화가와의 친분이 없이는 자신의 그림을 전시할 기회도 없거나 또는 친분이 있으면 스캔들로 매도해 버리는 당시 시대의 풍습들을 보여준다.
결혼 전에는 활발한 미술 활동을 하였지만 결혼 후에는 미술사에서 홀연히 이름이 사라져 버리는 여성 화가들의 한계와 제약이 주로 그려진다. 이 상황 속에서도 인정 받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베르트 모리조의 발언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나는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그들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동등하게 대접받기를 원한다.
2부에서는 편견과 억압을 뚫고 운명을 만들어나간 여성 화가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등 9명의 화가들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화가는 바로 성폭력 피해자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끝내 포기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룬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이다. 열입곱 살에 스승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법정 재판까지 회부되었던 젠틸레스키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문에 시달려야 했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일들은 젠틸레스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다른 화가들이 주로 완곡하고 관능적인 여성 묘사를 한 데 비해 강하고 담대하게 표현한 작품들은 그녀의 경험이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책 속에 묘사된 수많은 화가들은 자신들의 업적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때로는 남편의 작품으로 세상에 평가되었다. 아버지, 남편 등 남자의 이름으로 높게 평가되었던 작품들이 훗날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 판매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어느 새 평단은 동일한 작품임에도 기존과 상반된 평가로 바꿔 작품을 끌어내린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에 수록된 여성 화가들은 부유한 부모가 있거나 화가를 둔 아버지의 교육이 있었기에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교육이 단절되고 외모와 교양이 함께 있어야만 가치를 인정받았던 그 때에도 조각상을 보며 독학으로 인체를 공부하거나 집 바깥의 곤충들을 관찰하며 그림으로 그리는 등 좌절하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설명해간다.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 화가들의 이름으로 독식하는 미술사이지만 분명 그 긴 세월동안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활동을 펼쳐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팀 버튼의 영화 중 <빅 아이즈> 라는 영화가 있다. 실화인 여성 화가 마가렛 킨과 남편 월터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보수적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내 마가렛 킨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도용하여 판매를 하며 명성을 쌓는다. 남편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던 마가렛 킨은 후에 자신이 원작자임을 밝히고 남편인 월터와 긴 저작권 공방을 벌이게 되는 실화이다. 현재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보수적인 시대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던 일이였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음지에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젠틀리스키는 성폭력과 자신을 둘러싼 추문과 싸웠고 수잔 발라동은 여성의 몸을 성적 매력으로만 제한시켰던 미술계에서 과감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내며 남자들의 시선에 자신의 작품을 투영시키기를 거부하였다. 그렇게 여성화가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묵묵히 작품 활동을 해 나갔다.
책을 읽으며 과연 이 시대는 15-16세기의 사회에 비해 개선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쉽게도 현실에서 아직도 미투 운동은 진행중이고 성폭행의 주범들은 가벼운 형량만 받고 사회로 복귀한다. 이 반복되는 움직임에 분노가 때론 좌절이 표출된다. 하지만 기억하자. 지금보다 더한 차별 속에서도 여성들은 꿋꿋하게 자신의 일과 이름을 지켜나갔다. 그림 속에 몰래 자신의 얼굴을 투영시켜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고 자신의 그리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거부하기도 하면서 싸워 나갔다. 그렇게 미술사에서 포기하지 않고 싸워 온 여성들에 의해 여성 화가의 명맥은 이어져나갔다.
비록 사회가 더디게 변화할지라도 끝까지 싸워 온 그녀들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이 책에 수록된 여성들은 말해준다. 끝까지 싸워나갈 때 우리는 그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