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여성을 향한 범죄가 급증한다. 남성에 비해 힘이 약한 여성들은 피해의 대상이 되기 쉽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상 조심하며 두려워해야 한다. 이유는 없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성 범죄에 대하여 사회는 그다지 심각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왜? 이제 이건 흔한 범죄이니까.

《레이첼이 돌아왔다》는 미국 추리작가 협회상인 에드거상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동생 노라가 언니 레이첼의 집에서 언니와 키우던 반려견 페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갑작스런 언니의 죽음에 노라는 언니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깊은 상실감에 노라는 넋을 잃지만 노라에게는 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내고 뒷수습을 해야만 한다.

경찰은 언니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노라는 조사 과정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실을 목격하게 된다. 일반 개라고만 생각했던 반려견 페노가 특별 방범 훈련을 받은 개였다는 것도, 언니가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노라에게는 생소하기만 하다. 이제껏 언니를 가장 잘 안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이건만 경찰로부터 접하는 언니의 이야기는 노라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다.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경찰은 언니가 15년 전 파티가 끝난 후 귀가길에서 알지 못한 범인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던 과거로 거슬러간다. 끝내 잡히지 못한 이 사건의 가해자가 언니를 죽였으리라 추정한 경찰과 노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기 시작한다. 과연 15년 전 언니를 폭행한 가해자가 범인일까?

《레이첼이 돌아왔다》에서 내가 주목한 건 이 폭행을 당한 후 피해자인 레이첼의 반응과 동생 노라의 입장이었다. 보통 여성들은 폭행을 당한 후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자신이 겪은 사건을 증언하길 불편해한다.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종종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2차 피해가 되는 일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안희정 수행비서로 성폭행의 진실을 밝혔던 김지은씨도 그 사건의 하나이다. 그렇게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언니 레이첼은 적극적으로 범인을 찾아나선다. 자신이 겪은 사건을 설명하며 혹시 보지 못했느냐면서 포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동생 노라는 언니에게 그만 잊으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됐다고,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며 마지 못해 포기했다고 말하지만 레이첼은 15년이 지났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언니가 교통사고라고 거짓말을 할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두들겨 맞았어요. 그 남자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데

검은 머리를 턱까지 길렀고 캔버스 재킷을 입고 있었고요.

길고 좁은 얼굴에 이마뼈가 눈에 띄는 사람이에요."


15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사건은 언니와 노라의 삶에 깊게 박혀있었다. 노라 또한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도 이 사건은 지워지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한 범죄가 마무리되면 곧 잊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범인이 잡혔다 하더라도 그 범죄의 파장은 피해자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로 인한 두려움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마음 속에 내재해 있다 불쑥불쑥 튀어 나오곤 한다. 《레이첼이 돌아왔다》는 노라가 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나서면서 여성을 향한 범죄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이 평소에도 두려움에 휩싸여 있음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학시절 선배와 자취했던 때의 사고가 떠올랐다. 보안장치가 허술했던 자취방에서 강도의 침입으로 인해 큰 일을 당할 뻔했던 그 때의 기억을 소환해냈다. 천만다행으로 큰 일은 피할 수 있었고 미수로 끝난 사건인지라 경찰 또한 레이첼의 15년 전 사건처럼 형식적인 수사만 할 뿐 사건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그 당사자인 나는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당시의 상황, 범인의 말투, 느꼈던 공포는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때의 두려움은 종종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비슷한 경험으로 인해 나는 감정이입할 수 있었고 레이첼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반전은 매우 강렬하다. 평이하게 진행되던 사건이 후반부에 들어가며 예측 불가의 방식으로 이야기가 바뀌어가고 읽는 독자를 또 한 번 혼란속으로 몰고 간다. 15년 전 폭행과 현재의 범죄가 맞물려가며 범인을 찾아가는 이 소설의 구조는 매우 영리하고 교묘하다. 여성 혐오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