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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사랑의 라이벌이 사람이 아닌 식물이라면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식물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거절한다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좀 더 나은 타이밍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려야 할까?
아니면 비교가 될 수 없는 존재에 과감히 포기하는 게 좋을까?
《사랑이 없는 세계》의 주인공 후지마루는 양식당 '엔푸쿠테이'에서 일하는 입주 종업원이다. '엔푸쿠테이'는 사장이자 요리사인 쓰부라야 쇼이치와 후지마루 요타 단 둘. 오래전 이 식당의 맛에 매료된 후지마루는 사장 쓰부라야의 요리를 배우기 위해 엔푸쿠테이 식당에서 일을 하며 요리사의 꿈을 키워간다.
국립T대학 근처에 위치해서 학생과 교직원이 많이 찾는 이 식당에 사장은 배달 서비스를 실시한다. 물론 배달은 후지마루 담당이다. 어느 날 T대학 자연과학부 B호관 361호로 배달을 가게 된 후지마루는 마쓰다 교수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 모토무라를 만나게 된다.
연구실에 음식을 배달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식물을 연구하는 마쓰다 교수실의 연구원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특히 애기장대의 잎사귀를 연구하며 이 식물학의 세계에 도취된 모토무라와 가까워지며 후지마루는 마음을 키우게 되고 모토무라에게 고백을 하게된다.
후지마루의 고백에 놀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키워왔던 식물에 마음을 빼앗긴 모토무라는 자신은 이미 식물 이외에 어떤 마음을 줄 수 없노라며 조심스레 거절한다.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대학 졸업 후 취직해서 결혼하는 보통 여자의 삶을 살기 바라셨던 부모님의 바램을 꺾고 식물학도의 꿈을 키우며 공부하는 모토무라에게는 자신의 연구인 애기장대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수적인 것들이다.
음식도, 미용도, 취미도 즐기기에는 자신의 시간 하나 하나가 너무 소중하다. 모토무라 뿐만 아닌 마쓰다 교수 연구실에 있는 모든 동료들 모두 각자의 연구 식물에 대한 사랑으로 연구를 위한 지난한 과정을 이겨나간다.
《사랑이 없는 세계》는 모토무라의 표현처럼 감정도 사랑에 대한 개념도 없는 세게를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모토무라에게는 애기장대가, 가토에게는 선인장이, 모로오카 교수에게는 덩이줄기가 그리고 요리사 후지마루에게는 음식 등 각 인물들의 애정과 열정이 이 소설 안에 그려진다. 남들이 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고 타 학과에 비해 인지도도 낫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기쁨을 이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대리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
학창 시절, 잊고 지냈던 열정, 비록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그 꿈을 느끼게 해 준다.
비록 식물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음식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후지마루와 불안한 미래이지만 사랑 없는 식물에 대한 연구를 정진하는 마쓰다 연구실의 연구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읽는 내내 따뜻함을 안겨준다.
저자 미우라 시온의 전작 [배를 엮다]에서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전 편집을 담당하는 출판사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사랑이 없는 세계》는 식물을 사랑하는 마쓰다 연구실의 사람들과 요리를 사랑하는 후지마루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응원하게 해 준다.
책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태도를 반성하게 한다.모토무라의 연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후지마루의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든 사랑의 결실을 맺는지보다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미우라 시온은 알게 해 준다.
식물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많아 다소 읽히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일을 향해 다가서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만 읽다 하더라도 이 소설은 충분한 매력이 있다.
뭔가 무기력하고 자신의 일을 돌아볼 때 이 소설을 읽는다면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 오히려 그것을 즐겨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대응책을 짜면
참신한 연구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상대로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만 하는 실험은 지루합니다.
지금은 중학교의 과학 시간에도 교과서대로가 아닌,
학생들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주는 즐거운 실험을 계획하는
선생님이 많이 있지 않습니다.
실험에서 중요한 건
독창성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실패 끝에 뜻밖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