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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ㅣ 창비시선 426
나희덕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시대는 문화계의 암흑기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양심을 지켜 쓴 소리를 하며 비판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던 수많은 연예인, 작가, 문화예술 종사자들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검열 대상이 되고 지원 대상에서 비밀리에 제외되었다.
<파일명서정시>는 시대의 강한 탄압과 부조리함 속에 울분을 참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저자의 다짐이 담긴 시집이다.
내가 만났던 나희덕 시인의 시집은 [그녀에게]라는 시집이였다. 여성들의 비밀편지가 되고 싶다던 저자의 글처럼 여성의 내면과 일상을 그려내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억압과 탄압 때문이었을까? 모성적 서정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제 <파일명 서정시>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함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희생되어 가는 존재들, 단 한 명도 구해내지 못하고 300명이 넘는 생명들을 바다 속에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 울분을 과감하게 토해낸다.
지금도 교실에 갇힌 아이들이 있다
책상 밑에 의자 밑에 끼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다리와
유리창을 탕,탕, 두드리는 손들,
그 유리창을 깰 도끼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는가
- 난파된 교실 - 47p
무조건 어른들 말씀만 잘 들으면 된다고 배웠던 어린 생명들, 그들의 배움이 그릇된 어른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숨이 차 오르는 순간까지 살아남기 위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바다 속에 갇혀야만 했던 아이들.. 그 누군가가 유리창을 깨뜨려주었더라면...
살아남은 자도 그들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대중의 요구 속에 슬픔을 온전히 토해내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간신히 벌린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말들이 있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말들이 있다
-문턱 저편의 말 일부 50p-
자본주의라는 이름 하에 스승과 제자가 서로 평가대상이 되고 단 하루 만에 자신의 책상이 사라질 수 있으며 투명인간 취급 받는 현 시대, 인간 또한 트럭에 갇혀 도살장으로 향하는 돼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탄식한다. 생명의 존엄보다 쓸모에 따라 분류되는 인간의 분류법은 이제 동물들과 다를 바 없다.
나치스 대신 자본주의라는 장갑을 낀 손으로 교수를 감별해낸다.
필요성보다는 불필요성을 가려내기 위한 분류법.
권력과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전혀 불필요한 교수로 분류된다.
-어떤 분류법 일부 67p-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지는지
분홍빛 살이 푸대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이 도시의 트럭들 일부 52p-
어느 시 하나 쉽게 읽히는 시는 없다. 시대를 향한 울분 속에 파일명 서정시라는 암호 속에 어둠의 시간을 보냈지만 시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 쓰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낸다.
계속되는 파도 속에서도 함께 노를 저어 찾도록 권유한다.
시인이 결코 어떤 압박에도 쓰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우리도 지금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노를 젓도록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이겨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에.
비록 힘들고 어두운 시대이지만 함께 나아가자고 손을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