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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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영 작가의 <타운하우스>는  독특하다. 한 마디 느낌으로 한다면 서늘하다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첫 번째 단편 [말의 눈]을 보면 타운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수연의 집 지붕에 물이 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인적이 드문 곳, 비는 쏟아지는데 지붕을 고치기 쉽지 않다. 마침 레몬청이 담긴 유리병을 들고 찾아온 지희가 찾아온다.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신고된 지희의 딸. 
그리고 그 현장을 목격했지만 나서지 않는 수연의 딸 서아. 
지희는 수연에게 서아를 설득해서 말해달라고 매일 찾아온다. 수연은 서아에게 진실에 대해 묻지만 서아는 두리뭉실하게 말한다. 

"그냥 보기만 했어." 

보기만 했다는 말이 더 의미심장한 것은 서아 역시 학교폭력으로 내쫓기듯 이 곳에 왔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집 <타운하우스>에서는 '보기만 했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두 번째 단편 '쥐'로 옮겨가면서 더 큰 의미로 발전된다. 

군인 사택에서 살고 있는  윤진. 군인 사택에서는 남편 계급이 부인들의 계급과 같다. 같은 직종에 근무하기에 이웃과도 친하게 지내는데 쥐를 찾기 위해 찾아다니는 대령급 사모를 만난다. 

쥐를 보았느냐고 묻는 윤진에게 사모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며 말한다. 

"사고의 진위 말이야. 
이렇게 인사이동이 많은 동네인데 그 사람들을 다시 같은 관사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 
그건 소문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의지 아니겠어? 
여기서는 말이야. 눈에 보이는 건 답이 아니야!"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진실은 가려져 있다. <말의 눈>에서 서아가 보기만 했다고 하지만 본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건 제대로 본 것이 아니다. 또한 쥐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쥐가 없는 것이 아니고 어딘가에 있듯 진실은 보지 않았다고 해서 쥐가 없는 게 아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면 쥐는 어디에서나 있다. 

안과의사 은애가 제약회사 직원 재복과 연계해 보험을 타는 내용을 그린 이야기 <맹점>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요양원비를 내기 위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은애. 막상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의 눈을 치료해주지만 정작 자신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는 은애는 그 맹점으로 인해 재복과 결탁하고 일을 벌린다. 

"그런데 선생님.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 아시죠?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도 아실 테고요. 
눈이 안 보이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에요. 주로 자신보다는 남부터 해치거든요. 그래 놓고 몰랐다고 하면 
뭐.... 끝이죠." 


눈에 안 보이는 것. 그건 <언캐니 밸리>에서 청한동의 부유한 사람들이 그들 밑에 일하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현상과도 일치한다. 거동도 힘든 부유한 노부인들이 젊은 여성을 작품 대여비라고 하며 몇백만원을 주지만 정작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자본주의의 사회. 한 사람이 염산테러를 당했지만 그 테러의 피해자가 누군지 보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파티를 위해서 하숙생을 소리소문없이 있어 달라는 성박사의 행태 등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대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제대로 본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답을 찾는다. 둘째 아들을 잃고 사이가 멀어진 혜경과 윤석. 그들은 그 원망의 대상을 잘못 찾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간이 가도록 서로 대면하지 못하고 서먹한 관계로 지내야했다. 하지만 막상 원망의 대상인  전 前시장의 실종 후 제대로 된 진실을 보게 된다. 그런 후 비로소 화해의 단추가 시작된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또는 부부관계에서, 가족 관계에서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서늘하게 피쳐주는 듯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제대로 보고 있는가? 

과연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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