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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늙어간다는 것 - 80대 독일 국민 작가의 무심한 듯 다정한 문장들
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유영미 옮김 / 북라이프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나이 들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은이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솔직하고 간결하고 다정한 “나이 듦”에 관한 에세이, 80 평생을 자유롭게 살아온 그는 방송작가와 진행자로 일하면서 거침없는 하이킥를 날리는 통에 방송국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독일 사회의 노화, 늙어간다는 것, 나이 듦에 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늙음, 은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완성됨, 이룸과 삶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다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누구에게는 멋진 세계, 세상이고 또 누구에게는 어둠과 고통일 수도 있다.
이 책에 실린 15개의 이야기, 젊음이란 무엇인지, 늙어가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늙어가기란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기, 우리는 문학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책을 져야 한다. 노인의 세계는 기억의 세계다. 하루하루가 자신의 날이다. 새로운 출발과 힘찬 발걸음을 책을 골라 읽고 소개했던 그의 경험에 녹아들어 있는 글 모음이다.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하게 한다
방하(放下) 내려놓음이다. 명상하는 이들이 먼저 하는 행동이다. 불가에서도 방하하라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서 욕심, 욕망, 기득권이라는 고집, 나 이런 사람이야 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것인데, 엘케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살인자의 건강법> 속에서 다음의 문장을 끄집어낸다.
“사람은 매일 늙는 건 아니다. 늙는다는 느낌 없이 10년, 20년이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고 나서 두 시간 만에 20년이 한꺼번에 덮쳐온다.”
이는 이런 상황을 경험해 본 많은 사람의 가슴을 꿰뚫는다. 기나긴 분쟁 속에서 재판을 10년 동안 해 온 어떤 사람은 대법원의 판결을 받는 순간, 지금껏 심신을 눌러왔던 긴장감에서 해방된다. 바로 이 순간 한꺼번에 몰려오는 노화로 머리가 새하얗게, 치아는 다 빠져버리고, 온몸을 눌러오던 질병의 고통이 한순간에 그를 덮친다. 엘케는 자기 엄마도 이혼한 뒤 갑자기 폭삭 늙었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엘케에게 노년은 인생의 멋진 시기다. 맘껏 살아도 되는, 세상에 더는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없다. 누가 나를 어떻게 보든 그런 나이가 됐으니, 기쁨이 되는 일만 할 수 있는 특권이 생기는 나이이기도 하다. 몸을 사릴 필요도 없이 평소에 하던 말을 내뱉어도 된다. 이 책을 쓰듯 말이다. 외모, 나이 들면 자연스레 목줄이 쳐지고, 눈가에 주름도 지기 마련인데, 나이 들어도 얼굴 관리를 하는 게 품위라는 외모지상주의에 세뇌된 사람들, 스트레스받으면 큰일이 일어난 줄 아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그는 “삶은 곧 일이야”라고 말한다. 보톡스 맞아 빵빵해진 얼굴보다 삶으로 빵빵해진 인생을 사는 여성들이 멋지다고 선언한다.
죽음에 관한 생각: 삶의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됐고 화살이 날아온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저 위에서 운명이 영원으로부터 죽음의 활시위를 당긴다. 그 화살은 우리가 숨 쉬는 내내 날아온다. 화살이 도착하면 우리는 멈춘다(독일 소설가 장 파울, 51쪽).
경제적 유용성과 관계없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 세상에 참여해야 하고, 죽을 때까지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사람을 가장 빨리 늙게 하는 것은 도전하지 않는 삶이라고 갈파했다. 노동 사회는 끝났다는 독일의 철학자 프레히트는 현대인이 더는 생존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사회적 소속감을 추구하려고, 즉 임금 노동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려고 노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임금 노동과 성과사회가 점차 “의미사회”로 전환되면서, 물질적 번영과 양적 성장보다는 일의 질과 조건, 자유로운 삶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모두를 위한 자유>(열린책들, 2025).
엘케의 나이 듦에 깔린 생각과 현대 사회의 흐름은 비슷한 맥락이지만 방향은 같다. 피로함, 은퇴, 쉼, 편안함이 나이 듦을 표현하거나 상징하는 데서, 새로운 삶, 거침없는 자유, 기쁨이 되는 활동이 나이 듦의 키워드로 자리매김한다. 늙음 뒤에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에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을 바탕에 깔면, 세상은 새롭게 보일 것이다. 노년에도 우리는 뭔가를 잃고 뭔가를 얻는다. 어떤 나이대든 모두 경험하듯이, 나이 든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다.
평생 책을 읽고 대중에게 책을 소개하고 나이 듦, 노년, 죽음에 관한 문장들을 소개한다. 한 권의 책 속에 담긴 다양한 이들의 생각을 전해준다. 법학자, 정치사상가인 노르베르트 보비오<노년에 대하여>에서 말한 구절을 끌어온다.
“노년의 삶은 인생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삶에 대한 태도는 당신이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삶을 가파른 산으로 보는가, 천천히 헤엄쳐 나아가는 넓은 강처럼 보는가, 사방이 나무로 들어찬 빽빽한 숲으로 보는가, 당신은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노년은 세상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유”를 받아들일 것인지 어떨지는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다. 노년은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는 시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