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포기할 자유
철학적인 제목의 이 책<포기할 자유>(Freedom to give up)는 작가 이재구의 꿈은 노마드(유목민)이지 않을까, 그는 국경 없는 학교 짓기 활동을 한다. 자유, “프리덤(Freedom)” 윌리엄 월리스(멜 깁슨 주연)의 실화를 다룬 영화<브레이브 하트(용감한 마음)>의 대미를 장식하는 화면 속 울림이 프리덤이다. 나에게 자유를, 우리에게 자유를... 스코틀랜드가 영국 왕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전쟁은 그렇게 프리덤의 울림으로 후일 다시 살아난다.
실존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는 인간이 자유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이를 포기하면서 권위주의에 종속되는 심리를 파헤친다. 주어진 자유, 무늬만 자유, 형식적 자유는 어떻게 사람들을 구속하는가, 자유의 역설, 프롬은 자유를 얻은 개인은 더는 전통 공동체에 기댈 수 없게 되며, 고립감,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는 사람들이 이런 불안에서 탈출하려고, 자발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고 권위적인 체제나 집단에 종속된다고 봤다. 그 기제는 권위주의적 성향, 파괴성, 기계적 동조다. 마치, 조선 시대 자작농들이 삼정을 피하려고 양반 지주에게 자기 땅을 바치고, 그들의 보호막으로 들어가는 자발적 노예 상태를 선택할 수 없는 상황과도 같다.
이 소설은 지은이의 자기 회상일 수도, 어릴 적부터 돈 중심의 정글만리를 헤쳐나온 경험이 녹아들어 피보다 이념, 이념보다는 돈을 좇는 현대인의 속성을 날카롭게 그린다. 지그문트 바우만의<지그문트 바우만 행복해질 권리>(21세기북스, 2025) 에서 현대 사회를 액체 사회로 규정하고 고정된 질서 이른바 최소한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비와 돈이 척도가 되는 유동적인 사회에서 인간은 불안정과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행복은 곧 돈으로 환치된다는 점을, 그렇지만, “살아있는 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울러 백숭기의<사르트르를 만나다>(한스미디어, 2025) 역시,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노력, “자유롭게 살도록 선고받은” “우리는 자유를 그만둘 자유가 없는” 인간이 제대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를 묻는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진지한 철학의 문제는 오로지 자살뿐”이라고 말했으니까, 공허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마주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충동이 자살이다. 부조리란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카뮈의 말대로 삶은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그가 말한 이방인이란 단순히 외부인이 아니라 낯선 말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한 인간’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사람,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간이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고아 같은 존재라면, 그건 존재의 목적도 원인도 없는 부조리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런 자신의 무목적성과 인생의 몰개연성을 깨닫는다면, 인생을 더 살아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자살이 유일한 인간의 선택지로 남을 수밖에.
돈 “황금종이”가 갖는 위력은 피보다 진하고, 이념보다 강하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자본과 종교의 프리즘을 통해서 지속 가능한 희망이 있는지를 묻는 이 소설, 금광을 크게 열었다는 형구, 그는 이국땅 카지노에서 20억 원을 몽땅 날리고, “포기할 자유”을 얻었노라고 말하며 호텔 방 창문 아래로 몸을 던지고, 몇 개월이 후에 공개된 그의 유언장에 어렵게 사는 조카들을 비롯한 친인척들에게 지분을 나누어 주라는 문구가 또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키는데, 형구의 자식들은 사촌과 친척들을 꾀어서,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려는 이전투구가, 이 중심에 놓여있는 건 “돈” 조정래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황금종이”다. 포기할 자유는 형구에게만 해당한 것이었을까, 그의 아내 미현은 자식들에게 말한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아빠는 배움도 없이 빈손으로 시작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사업을 크게 키운 분이야..., 아빠는 원효대사의 대자유를, 체 게바라의 거룩한 분노를 사랑했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려 노력했던 분이야... 예수께서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제자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지. 아빠는 너무 낭만적이고 집안에서 영향력이 너무 커서 형제들에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 거야. 돈에 영혼을 팔아 버린 사람들이 이 지경을 만들었구나. 너희들이 지분 10%씩만 받아도 수백억 아니, 천억은 넘을 거야. 거기서 더 욕심내지 말고...” 이 소설의 압권은 바로 이 대목이다.
작가는 “불행한 가족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다.”라는 레프 톨스토이 소설<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현대, 삼성 등 재벌가의 상속 뒷이야기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슬픔보다 더 강한 건 혈육이 아닌 "돈"의 향방임을, TV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의 여주인공 또한 형제 사이의 "돈"이다.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는지, 마치 권력은 부자 사이에서도 나누어 가질 수 없듯이, 형제 사이의 권력쟁투, 이제는 "권력"의 자리에 들어가는 건 "돈"이다.
그렇다. 불행의 기준과 척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불협화음, 시기와 질투, 갈등의 밑바닥에 흐르는 진짜 이유는 뭘까, “돈” 그게 없어 불행하다고, 느끼는 걸까, 덫에 걸린 영혼들이 하는 말처럼, 행복한 가정이란 어떤 상태... 늘 흔들리는 액체가 잔잔해지도록 균형을 잡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