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 행복해질 권리 - 세기의 지성이 불안한 현대인에게 건네는 철학적 조언 아포리아 7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김수진 옮김, 노명우 감수 / 21세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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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우리 삶에서 행복해질 권리란 무엇인가?


이 책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라는 불안정, 불확실성의 시대를 아우르는 개념의 중요 요소인 ‘소비사회’가 찾아낸 일반적인 행복의 척도는 “돈”이다. 견고한 가치가 무너져 흐물흐물해진 액체가 돼버린 것이다. 소비가 삶의 본질이 되기에 돈은 행복의 필수 요소다. 신자유주의는 곧 각자도생을, 노동자 계급의 분화의 요인 또한 “돈”이기에,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으로 믿고, 끊임없이 소비하는 나,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벌며 지쳐가는 나, 그렇지만 여전히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악순환의 뫼비우스 띠에 올라타 버린 형국이다.


바우만은 ‘추구할 만한 가치들이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행복이란 게 있기나 할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책 구성은 이에 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행복이란 바로 지금, 여기서 모든 게 즐겁게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흘러버리거나, 거기에 머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모습일까?, 바우만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좋아하든, 모호하든, 우리 인생은 예술 작품”이며, ”삶은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우리 삶의 예술가라고, 고정된 그 무엇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 제멋대로 형태와 모양을 잡는 것이다. 즉, 노자의 자중자애(自重自愛), 세상의 주인공은 나요. 나를 소중히 여기면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제 각각... 프리드리히 니체의 워버멘쉬(극복한 사람)는 온전히 인간적이고 행복한 삶을 사는 이상적인 비결이라 했다. 극복한 자야말로 진정한 귀족이라고, 


이 책의 서문은 바우만의 행복에 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이를 3장으로 풀어서 설명하는데, 1장 ‘행복의 비극’에서는 소비사회가 바꾼 행복의 모습을 톺아보면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현대의 행복 찾기 게임에서 강요당한 행복 추구의 결과를 어떤 한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2장 ‘우리, 삶의 예술가’에서는 인생이란 예술 작품,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용기, 이기주의 퍼뜨리는 이데올로기를, 3장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에서는 행복 추구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설명한다. 함께하는 세상에 대한 희망, 결국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바우만은 우리가 나의 고유한 안녕에 초점을 맞출지, 다른 사람의 안녕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을지 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안녕을 돌보는 데서 출발할 자발적 인성이 있다고 믿는다. 이는 나와 너,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다른 이에 대한 책임 또한 따른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술가의 삶으로 산다는 건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형태나 모양이 정해진 게 없는 것에 형태와 모양을 잡아준다(질서를 잡는다), 제멋대로 마구잡이식이라 예측 불가능 상황과 사건들을 조직화한다는 의미다. 칸트의 행복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이 품는 이상이라고, 그는 인간이라는 휘어진 재목으로는 곧은 것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인생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하나도 주지 않는다고.


함께하는 운명공동체 


불확실성은 각자도생으로 나타나며, 개인주의, 초개인화로 계속 분화해가고, 개인주의의 역량 증진 논리(성과주의 등)는 동전의 양면처럼 직장 동료를 사이의 협력과 상호 약속 연대를 쓸모없게 만들고 사용자들은 연대 대신에 각자도생을 유도, 파생된 생산성에서 이익을 뽑아낸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공동체의 연대는 낮아지고 공동체 의식마저 희미해지는 역효과를 낳는다. 이는 사회로 곳곳으로 확산하면서, 분자화와 고립화를,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결국 강요되거나 만들어진 행복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거나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액체 사회,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출렁거리는 유동하는 가운데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다. 바우만은 이반 클리마의 질문 ”개인의 행복과 새로운 사랑을 추구할 권리가 한쪽에 있고, 다른 쪽에는 가정을 파괴하고 어쩌면 자녀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를 무모한 이기심이 있다면, 이둘 사이의 경계는 어디쯤일까?“에 대하여,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경계선이 어디든, 유대의 끈을 묶고 푸는 것이 도덕적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행위라고 선언된 순간, 이 경계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처음부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사랑이 약속하고 기르고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무조건적 책임을 덜게 된다. 


소비지상주의 관행처럼 사랑은 기성품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끊임없는 돌봄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유대 관계가 점점 약해지고, 장기적인 약속(조건 없는 책임)은 힘을 잃고, 권리에서 의무(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제외하고)를 빼버린다. 마침 게임을 하듯 일이 틀어지면 리셋(초기화)해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현상은 불안에서 온다(인지편향). 바우만은 이런 진단 속에서 깊은 우정과 동료애를 맺어진 유대 관계는 흔들리고 불안정, 불확실성 시대에 밀려오는 격렬한 물결(직장 동료들 사이에 서로를 의심하는데 중독돼있고, 살인적인 경쟁으로 찢겨 불안정하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이웃 공동체의 복원과 부활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박홍규의 최근 책<우정이란 무엇인가>(들녘, 2025)에서 그가 주장하는 ”우정 공동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박홍규가 주장하는 “우정 공동체”는 인종과 국가, 성별 등 그 밖의 모든 국경을 넘어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우정이나 친족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잠재적으로 급진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자신을 무너뜨리고 새로워질 수 있다고 본다. 


바우만은 고대인들의 지혜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는 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라고, 각자도생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를 사유해야 할 시간이다. 지금이야말로 불확실, 불안정시대를 사는 우리는 바우만의 조언을 경청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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