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라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 울하임의 역설-
시민들이 법안에 찬성하거나 특정 후보자를 지지하는 데 표를 던진다(B 상황)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만약 개표결과로 법안이 부결되거나 상대 후보가 더 많은 표를 얻는다(이 상황을 ~B라 부르자)면, 딜레마가 생긴다. 법안 지지자인 시민들은 B를 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자이기도 한 시민들은 ~B 역시 원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같은 것을 동시에 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울하임은 민주적인 유권들의 내적 갈등을 “민주주의의 역설”이라 불렀다.
울하임은 만약 유권자들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면서도 민주적 가치에도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어떠한 선택지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언론이나 정당 같은 민주적 장치들이 ~B에 대한 선호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할 경우, 언제든 B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포기할 준비가 된 유권자라면,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B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충분히 많은 다른 사람이 나처럼 B를 선호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 이러한 경우라면 이 유권자는 ~B에 표를 던지거나, 아니면 실제로 아예 기권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그는 민주주의에는 충실할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 역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울하임은 직접적 원칙(살인은 잘못됐다와 같은 정책)과 간접적 원칙(국민의 의지로 이루어진 결정은 옳다와 같은 결정 절차)을 구분, B와 ~B는, 만약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면, 다른 수준에서 작동하므로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울하임은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소견으로 모순되지 않음을 입증했으니, 나머지는 유권자의 몫이란 말인가,
미국의 철학자 콰인은 역설(파라독스)을 처음에는 부조리하게 들리지만 그렇게 주장할만한 어떤 논거를 가진 모든 결론이라고 정의했다. 역설적 진술 중에는 처음에는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부조리가 드러나는 일도 있다. 물론 이와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