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사기- 인공지능의 시대 디아스포라
작가 이기원의 장편소설 <사사기>는 구약성경 사사기(사사(士師記)에 나오는 사사(판관)들은 하느님의 명을 이스라엘 민족을 이민족의 침입에서 구해내는 역할을 하고 평화 시기에는 재판장의 역할을 했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 픽서(경찰 역할)우종, 전국기업인연합(전기련, 정부대체기관) 감사본부의 영무, 전기련 홍보부 산하의 기자 재민과 주변, 그리고 저스티스-44(사사), 백여 년 전 인류는 전쟁과 역병으로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런 혼란을 틈타 가진 자들의 논리는 ‘정의’로 왜곡되고, 양극화는 당연한 것으로, 지역, 인종, 종교, 세대 등 모든 것이 갈등의 원인이 됐다. 자동화된 시스템은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혼돈 그 자체였다. 한국에 등장한 기업인연합정권, 행정과 입법, 국방, 사법마저 한 손에 쥔 전기련, 그 안에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인공지능 판사 저스티스-44가 사회질서를 완벽하게 통제한다. 과거의 서울이고 지금은 뉴소울시티(겨우 서울만 사람들이 살아남은 지역이 됐기에).
정부는 전기련 의장사의 회사명을 쓴다. 지금은 아바리치아시대, 코로나 219로 팬데믹으로 또다시 혼란 속으로, 이때 인공지능 판사가 등장한 것이다. 문제의 저스티스-44는 43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던 44번째 시험에 통과한 것이라는 의미다.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공지능 그것이 생성형이든 학습형이든 기계가 아닌 인공 일반지능(AGI)으로 인간의 뇌 활동 수준을 수행하는 사유형 인공지능(영화 ‘터미네이트’ 시리즈 5에서 나오는 인간과 기계의 융합이 가능한 인공지능을 상상해보면 될 듯하다)의 명암을 모티브로 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유무죄를 가리는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죄의 경중을 물어 이에 합당한 벌을 주는 저스티스-44는 때때로 오류를 일으키는데, 그 비율은 어쩌다가 아니라 일련의 흐름을 보여주고, 이에 의문을 품은, 우종, 영무, 그리고 저스티스-44의 법질서 유지가 정의라고 생각하느냐는 의문의 쪽지를 받은 재민, 이들 세 명은 각각의 위치에서 의문을 향해 움직이는데, 판결의 오류는 조작된 것일까, 아니면 시스템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일까?,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일까?, 미심쩍은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니다. 저스티스-44의 판결을 의심하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은 것이라는데,
영생을 꿈꾸는 전기련 의장 아바리치아의 회장 류신과 의장 자리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는 맞수 이레스 박진형회장, 이들 최고권력층의 자식과 친인척이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다. 교차로에서 돌진하는 차량의 운전자?, 건물화재로 죽은 자?, 전기련은 인체에 무해한 각성제 에멘탈을 공급하고 이 또한 진화한다. “마티니”라는 유해물질로 이른바 뽕이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44에 관한 발상의 기발함과 아울러 SF영화 <데몰리션맨>의 구도와 비슷하며 <터미네이트>의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 하는 미래전망 등도 낯설지 않다. 또 작가의 전작 소설 <쥐독>을 떠올리게 한다.
인류의 자기 절제와 균형을 잃어버린 후에 찾아오는 디스토피아, 어디서 듯 보이는 한 가닥의 진실과 연결된 한 가닥의 밧줄처럼 그 무엇이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저스티스-44의 개발자, 치수는 “완벽한 저스티스-44”의 판결과정에 영향을 준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는 건물 자체가 서버인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이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저스티스-44의 자기 발전, 아니면 기능 상실, 인류의 미래는,
인공지능 판사는 완벽했던가, 완벽했다. 기득권을 쥔 자들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한 손에 저울 또 한 손에는 검을 쥔 저스티스-44를 내놓았다. 공정, 정의, 평등의 세상처럼 보였다.
권력의 속성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진시황의 영생불사라는 인간의 욕망과 바른 사회의 전형처럼 여겨졌던 소유 여부,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법을 어긴 자는 처벌받는다는 공평하고도 정의가 지켜지는 공정사회, 한편으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처럼 컨베이어벨트에 목숨을 거는 자본주의 거대공장의 부품이 돼버린(노동소외) 노동자들, 조지 오웰의<1984>빅브라더처럼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다 지켜보는 눈과 귀 등 인간 세상의 오만 것들이 다 들어있는 듯한 소설, 저스티스-44는 정의 실현을 위해만 엄정하게 판단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키아벨리즘을 나타내 보인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기 수준까지, 능력이 있어야 따르는 운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도 말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개발했던 기계들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과정에 끝에 보이는 그 무엇이, 그리고 뭔가를 창조했다는 것이 곧 착각이었음을, 창조가 만든 창조물은 변화하여 창조자를 조정하고 새로운 창조자를 만들어 내는 뫼비우스 띠에 얹혔음을. 꽤 흥미로운 소설이다. 날마다 넘쳐나는 AI 관련 서적, 그리고 사회적 관심 속에서 인공지능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담론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의 진보는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기술의 반격이, 힘을 가진 것이 힘없는 것을 억누르는 것, 그것이 인간이든 기계든 역사의 발전법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