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 -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서양근대사총서 6
김장수 지음 / 푸른사상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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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오스트리아 국모로 추앙받는 마리아 테레지아


지은이는 자유 베를린대학 역사학부에서 연구했고, 주로 한국과 유럽 강대국들과의 관계, 독일제국과의 관계를 살폈다. 한국 사회에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연구 관심이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와 독일제국을 탄생시킨 비스마르크에게로 쏠렸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그는 거꾸로 연구의 대상이 프로이센을 여러모로 보는 차원에서라도 당대의 오스트리아 사정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을 내놓았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의 5장으로 구성됐고, 우선 1장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이 이뤄질 무렵의 전후 주변국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과 관련한 “상호계승약관”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한 국사조칙의 제정 원인과 진행 과정 등을 다룬다. 2장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탄생과 성장 그리고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 자녀 양육 등의 성장과 가족관계를 다룬다. 3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3차에 걸친 왕위계승 전쟁(1740~1763)과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과 프로이센의 위상 등을, 4장. 계몽 절대왕정체제 구축에서는 하우크비츠의 내정과 다운 백작의 군제, 스비텐의 교육 등의 개혁을, 그리고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외교정책에 이르기까지, 5장은 말년의 활동으로 40년(1740~1780) 치세 중 25년은 단독으로 나머지 15년은 장남 요제프 2세와 함께, 장남은 어머니의 기대와는 다르게 충돌을 일으키기도,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제이자 국모로서 국민의무교육을 했던 개혁과 계몽 군주로 기억된 마리아 테레지아에 관한 이야기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개혁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23살의 나이로 오스트리아의 최초 여성군주로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 카를 6세는 세 딸을 두었기에 여성 왕위계승권에 관한 준비를 국사조칙을 통해 해두었고, 주변국인 프로이센, 프랑스, 바이에른과 작센의 승인까지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실제 여성군주가 즉위하자 여성의 왕위계승을 문제 삼으면서 주변국을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주도하여 25년 동안 세 차례에 걸친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된다. 흥미롭게도 1740년 프로이센에서는 28살의 나이로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모두 젊은 군주가 대립과 격돌을 하면서도 경쟁적으로 계몽주의를 수용하여 개혁을 도모했다. 




왕위계승 전쟁이 시작되면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겨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정자(남성이어야 하기에 여제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는 관례에 따라 독일 왕으로 선출된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하는 경로도 차단되는 등 국제 정치무대에서 굴욕을 겪기도, 이런 대외적인 위기는, 국내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으로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국내를 개혁으로 안정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다. 당대의 시대요구이기도 했던 계몽주의, 절대왕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의지이기도 했다. 우선 중앙정부 권한을 증대시키고 귀족들의 위상을 약화를 노리는 내정과 군제, 교육개혁과 외교정책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내우외환 책을 세운다. 특히, 신민 교육, 귀족세를 누르고 모두를 신민으로 다루는데, 이로써 절대왕정체제 구축을 시도한다.


왕위계승 전쟁과 절대왕정체제 구축을 위한 개혁들


절대왕정체제 구축은 하우크비츠의 제안한 내정 개혁안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각 지방 신분제 의회가 행정과 재정 분야에서 과도한 권한 행사를 막기 위한 제한, 지방통치, 재정과 군사 부문에 대한 귀족들의 처분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귀족들의 ‘조세동의권 제한’ ‘중앙정부의 행정권 강화’, ‘귀족과 성직자들의 면세특권 폐지’ 등이 제안됐다.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외교정책의 핵심은 프랑스와 동맹 구축이다. 당시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강해지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동맹 강화를 위해 오스트리아령이었던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기고, 자녀들의 결혼 상대는 반드시 부르봉이나 이 가문의 방계인 모데나 대공국 출신이어야 한다는 원칙까지 세울 정도였다. 군제는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전제에서 다운 백작은 군제개편을 한다.




교육개혁은 문화적 단일화를 꾀했다. 이 단일화는 의무교육을 통해 왕국 내에서 특히 독일인들보다 슬라브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독일어가 자연스럽게 확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전담, 주도했는데, 이를 국가의 임무로 규정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교육기관의 국립화와 세속화는 중앙집권체제에서 반드시 이행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당대 계몽주의에서 요구하던 교회의 예속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고 이들을 중세의 어둠으로부터 자유 및 평등이 구현되는 사회로의 이행에 동의, 교육기회를 여자아이에게도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774년 12월에 “오스트리아 왕국 내 시범학교, 실업학교 및 보통학교를 위한 일반 학제”를 발표, 펠비거가 발표한 교육개혁의 서문에는 ‘신민의 진정한 행복 증진을 가장 중요한 토대로 설정하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양성 청소년 교육을 시행한다’라고 적혀있다. 1780년에는 그 수가 500개를 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낯선 국가 오스트리아의 최초의 여성군주, 즉위와 함께 주변 강국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여왕승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된 3차에 걸친 왕위계승 전쟁 끝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지만, 1740년 같은 해 즉위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절대왕정체제와 계몽주의 개혁과 함께 프로이센 주도의 유럽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를 계기로 실행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역시 전쟁이란 불안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 국내 개혁 드라이브를, 결국, 위기를 기회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유능한 군주로 평가할 만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단력과 여성성을 함께 갖췄고, 의무이행과 성실성, 도덕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봤던 군주로 국모로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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