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계승 전쟁이 시작되면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겨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으로 오스트리아의 위정자(남성이어야 하기에 여제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는 관례에 따라 독일 왕으로 선출된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하는 경로도 차단되는 등 국제 정치무대에서 굴욕을 겪기도, 이런 대외적인 위기는, 국내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으로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국내를 개혁으로 안정시키려는 정책을 펼쳤다. 당대의 시대요구이기도 했던 계몽주의, 절대왕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의지이기도 했다. 우선 중앙정부 권한을 증대시키고 귀족들의 위상을 약화를 노리는 내정과 군제, 교육개혁과 외교정책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내우외환 책을 세운다. 특히, 신민 교육, 귀족세를 누르고 모두를 신민으로 다루는데, 이로써 절대왕정체제 구축을 시도한다.
왕위계승 전쟁과 절대왕정체제 구축을 위한 개혁들
절대왕정체제 구축은 하우크비츠의 제안한 내정 개혁안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각 지방 신분제 의회가 행정과 재정 분야에서 과도한 권한 행사를 막기 위한 제한, 지방통치, 재정과 군사 부문에 대한 귀족들의 처분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귀족들의 ‘조세동의권 제한’ ‘중앙정부의 행정권 강화’, ‘귀족과 성직자들의 면세특권 폐지’ 등이 제안됐다.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외교정책의 핵심은 프랑스와 동맹 구축이다. 당시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강해지거나 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동맹 강화를 위해 오스트리아령이었던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기고, 자녀들의 결혼 상대는 반드시 부르봉이나 이 가문의 방계인 모데나 대공국 출신이어야 한다는 원칙까지 세울 정도였다. 군제는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전제에서 다운 백작은 군제개편을 한다.

교육개혁은 문화적 단일화를 꾀했다. 이 단일화는 의무교육을 통해 왕국 내에서 특히 독일인들보다 슬라브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독일어가 자연스럽게 확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전담, 주도했는데, 이를 국가의 임무로 규정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교육기관의 국립화와 세속화는 중앙집권체제에서 반드시 이행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당대 계몽주의에서 요구하던 교회의 예속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고 이들을 중세의 어둠으로부터 자유 및 평등이 구현되는 사회로의 이행에 동의, 교육기회를 여자아이에게도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774년 12월에 “오스트리아 왕국 내 시범학교, 실업학교 및 보통학교를 위한 일반 학제”를 발표, 펠비거가 발표한 교육개혁의 서문에는 ‘신민의 진정한 행복 증진을 가장 중요한 토대로 설정하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양성 청소년 교육을 시행한다’라고 적혀있다. 1780년에는 그 수가 500개를 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