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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해방이다 - 자유이자 금지였고 축복이자 저주였던 책 읽기의 역사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4년 10월
평점 :
독서는 해방이다
울림이 큰 책 제목을 따라 이 책에 실린 그림을 보면서, 상상한다. 지은이 박홍규 선생의 머리말을 따라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그림을 글로 풀어본다. 독서는 지은이와의 대화다. 인쇄된 활자를 뚫고 그 안에 깔린 생각을 톺아보는 것이다. 독서는 지은이의 글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어떤 책은 한 편의 영화처럼, 또 한 폭의 그림처럼 강렬하게 뇌리를 파고드는데 또 어떤 책은 읽어도 아무런 기억이 없다. 지은이와 대화를 하지 않은 탓일까?,
박홍규는 수험서와 전문서를 뒤적이는 건 독서가 아니란다. 그 다운 표현이다. 지식기사가 되어 얄팍한 기술 풀이를 하기 위한 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올가미이자 출세욕을 안 받침 해주는 그 무엇이라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로운 독서가 없다는 점이라고 꼬집고 있다.
진정한 독서는 해방이다. 주위로부터, 나를 옭아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책을 읽는 순간 몰입하고, 그 책 속 세상과 교감하며, 완전한 자유를. 지은이는 최후의 심판일에 관한 보르헤스의 촌철살인의 문장 “천국은 도서관 같은 곳이리라”라는 문장을 저자의 글 제목으로 삼아, “팍팍한 현실만으로는 살 수 없기에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으며 상상한다, 자유를 위해 책을 읽는다. 그림도 자유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지은이가 고른 70점의 그림은 독서의 역사이며, 소수의 권력자 계급이 독점한 독서에서 일반 시민과 서민의 독서로 확대된 역사다. 독서의 자유, 평등이 확대된 역사다. 독서는 해방이란 주제에 어울리는 그림도, 진시황의 분서(焚書)를 상상케 하는 책을 불태우는 그림도 있다. 가톨릭교회도, 히틀러도 분서를 했다. 책이란 명암이 있다.
양서와 악서라는 이분법 말고도, 조선의 정조는 당대 인기도서였던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패관문체(옛날 중국에서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기 위하여 거리의 소문을 모아 기록시키던 벼슬 이름인데, 이 뜻이 발전하여 이야기를 짓는 사람도 패관이라 일컫게 되었다. 초기의 패관은 사실성에 충실했으나, 점차 창의성이 가미되어 흥미 위주로 변화함에 따라 하나의 산문적 문학 형태가 되었다. 패관문학은 뒤에 소설 발달의 모태가 되기도)로 쓰였다는 것을 문제 삼아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시도한 것인데, 성리학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금서 역시 그렇다. 지배 세력에 의해 출판, 판매, 독서가 금지된 책 또는 글을 의미하는데, 비기니 도참서니, 종교 서적,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으면 금서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남북한에서도 그런 책들은 금서가 됐다. 한글을 며칠 만에 깨우치면 삼십여 년간 공부한 양반들과도 소통이 되니, 한글은 당연히 써서는 안 되는 글이다. 한문체의 한문으로 써야 부리는 아랫것들과 차별성이 있나니. 글을 알고 생각이란 걸 하게 되고, 자유를 운운하면 그들의 세계는 불안이 찾아오고, 지위가 질서가 흔들리니 독서는 그저 할 일 없는 양반네들이 하는 것으로. 이 책에서 나오는 여성들의 이야기 또한 그렇다.
지은이는 여성의 자유와 해방도 놓치지 않고 보려 한다. 종교도 철학도 사상도 모두 함께 보려 했다. 이 책의 내용은 1장 중세에서 나오는 10점, 서양의 기독교 역사를 보여주는 예수, 수태고지, 복음서 저자들과 성자들, 그리고 단테와 크리스틴 드 피장이라는 근대 문학의 시조, 2장은 르네상스 시대 작품 13점을 다룬다. 3장 바로크 시대 13점, 독서가 시민들로까지 확대되는 17~18세기 독서문화를, 독서 확대에 이바지한 <책 행상인>, 도서관, 남성은 물론 여성으로까지 확대돼가는 과정에서 인간해방운동의 선구가 되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초상>까지, 독서가 인간을 계몽하여 사회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힘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4장~5장은 19세기 10점, 인상파를 한데 묶었다. 6장 20세기 11점, 버지니아울프를 비롯한 20세기 초반의 여성 독서인들, 레제의 노동자 독서인, 자본가 가족의 도서 등이 실려있다.
책을 읽는 화가의 전형 반고흐
우리가 지레짐작하는 화가들은 그저 그림만 그릴뿐, 독서를 얼마나 하랴 싶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에 그렇다. 물론 이 또한 고정된 생각이요. 관념이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심미안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들이 그린 그림을 해석하거나 깊이 있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무엇을 말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경우 말이다. 아무튼, 보고 느끼는 그런 것이라면 그림을 보고 읽는 것도 독서다. 반고흐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요즘에도, 그저 해바라기를 그렸던 미치광이에 가까운 하지만 천재적인 화가라는 이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에 멈춘다. 내면 분석까지 다룬 책들도 있기는 하지만, 지은이는 반 고흐를 꽤 구체적으로 조망한다. 그가 어려서부터 책과 그림을 두루 사랑했다고, 지성적이고 감성적인 고흐를 우리 앞에 내놓는다. 그림은 자신이 읽은 것을 이해하게 도와주고, 책은 자신의 본 것을 설명해준다고 믿었다. 지성과 감성의 조화와 융합이 그의 작품세계의 원천이었고 그렇기에 현
대 미술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봤다. 독서의 힘이다.
크리스틴 드 피장 <숙녀들의 도시>(1405년)
여성이 남성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탄식한 13세기 프랑스 성직자 마테올루스가 쓴 시<탄식>에 대한 반발로 쓴 책<숙녀들의 도시>, 나 자신과 여성이라는 내 성 전체를 자연의 일탈로 경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왕관을 쓴 세 여신이 나타나 좋은 성품과 굳센 절개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견고한 성채를 짓고 성벽을 쌓아 ‘숙녀들의 도시’를 세우라고 명한다. 거울을 든 이성의 여신, 자를 든 공정의 여신,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이다. 이에 견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장보다 160년 후의 조선 중기 허난설헌 또한 이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책과 관련된 그림 70 작품 속에 이야기들은 제각각 흥미롭다. 결이 다름도 있지만, 지은이의 작품읽기와 해석 해박한 배경 지식이 몰입도를 높여준다. 위의 두 인물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털어내 줄 중요한 재료가 될 듯하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