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의 혁명 - 비루한 삶도 고귀한 삶도 부활한다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4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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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읽기의 혁명은 니체 특유의 화법때문에 수많은 오해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손석춘은 바로 이런 대목에서 오해와 이해를 위해 "니체 읽기의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니체 읽기의 혁명


지은이 손석춘은 오랫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고 대학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며 책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때 철학을 공부하면서 니체를 접했고, 언론인으로 생활하면서도 니체를 놓지 않았다. 마르크스 철학과 하버마스 철학을 삶의 현실에 견주어 학위논문을 쓰고 대학에서 강의를, ‘비평과 커뮤니케이션’ 강의 시간에 니체 철학을 삶의 비평이론을 다룬다. 


이 책은 니체철학과 우주철학의 대화다. 니체가 경고했듯이 누군가의 철학에 다가설 때 자신의 관점을 잃지 않아야 한다. 니체를 읽을 때도 생각의 근육을 단련해가야 옳다고 강조하는 지은이, 그는 니체에 관한 세상의 두 가지 흐름을 지적했다. 하나는 삶에 지칠 때 힘을 얻고자 니체의 단편적 문장에 기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철학이 파시즘은 아니더라도 반민주주의임이 확실하다며 니체 읽기를 경계하는 것이다. 


손석춘의 니체 읽기의 혁명은 영원회귀 우주론을 바탕으로 주권적 개인들이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시대를 열망하는 니체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니체 애독자 중에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니체의 사유는 개개인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철학의 길에 들어서면서 ‘위대한 정치’를 구상했고 그의 시대 비판이 근대사회를 겨냥하고 있다. 권리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 개인의 정립과 그에 대한 니체의 깊은 통찰을 새겨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이 책의 구성은 6장 체재이며, 니체의 삶과 철학의 출발점(1~2장), 니체의 삶, 그가 보수도 진보도 경멸한 까닭을 싣고 있다, 철학의 출발점은 기독교와 휴머니즘을 비판한 우주론, 우주론(3장)에서는 힘에의 의자와 영원회귀, 형이상학적 이분법과 신의 죽음을, 인생론(4장)에서는 비루한 삶과 고귀한 삶, 죽음은 허무가 아닌 아름다운 축제라고 장자가 그의 아내가 죽자 북을 치면서 기쁜 얼굴을 하였다는 데 그는 힘든 삶을 떠나 이제야 평온을 찾았다고, 세계관의 차이는 이렇게 현상을 해석하는 게 달랐다, 니체의 영원회귀 철학과 우주과학을, 사회철학(5장)에서는 반민주주의자, 그 오해와 이해, 고귀한 사람을 질투하는 사회, 실천론(6장)에서는 임금 노예의 치욕을, 반도덕적 전투와 전투적 도덕, 주권적 개인의 정치철학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니체, 우리 사회의 니체 철학의 접근법은 꽤 유의미하다. 


손석춘은 이 책에서 그가 깨우친 니체를 말하며, 학문하는 태도를 지적한다. 니체 읽기의 기준은 유럽도 미국도 아닌 바로 현실 속 한국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한다. 유럽의 잣대로 한국을 재단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세를 손석춘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니체는 진짜 반민주주의자인가, 그 오해와 이해, 니체 읽기 혁명이 필요한 이유


지은이는 니체가 민주주의와 평등을 비판하는 글 때문에 반민주주의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흑백논리다. 니체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파시즘의 선전에 악용됐다고 봤다. 그 뿌리로 니체가 죽고 1년 후인 1901년 <권력에의 의지>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그의 여동생이 파시스트 남편의 직간접적인 개입 아래 오빠의 의도와 다르게 편집하며, 짜깁기에 가필까지. 이렇게 니체의 유고는 파시즘 사상을 담은 책이 됐다. 


지은이는 니체를 비판한 진보적인 법학자 박홍규의 <니체는 틀렸다>를 비판한다. 니체 전집 어디에서도 반민주주의적 문장들을 비판하는 해제를 찾아볼 수 없다며 시작한 박홍규의 니체 비판, 그는 니체의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한국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엘리트주의와 궤를 같이한다고 분석했다. 학벌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노동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초인이 되라, 귀족이 되고 주인이 돼라”라는 니체의 권고는 차별만 더욱 고취할 뿐이라고, 손석춘은 이 점에 관해 한국에서 많이 읽히는 배경을 살펴볼 때 한 번쯤 새겨볼 대목이라고 했다. 박홍규의 비판은 농구선수 출신의 예능인 서장훈이 개그맨 김제동을 비판한 대목과 궤를 같이한다. 장래가 어두워 불안해하는 청년들에게 ‘요새 청년들에게 괜찮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며 무책임하게 응원하는 발언’이라고, 김제동은 이런 강연을 하고도 수천만 원의 강사비를 받지만,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냈느냐고.


박홍규의 니체 비판은 단적으로 말해 니체 사상의 핵심은 인종주의 반민주주의라며 그의 귀족주의를 덧칠해 오로지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귀족주의는 현실에서 갖가지 독재로 존재한다고, 손석춘은 박홍규의 비판을 과도하고 한계가 뚜렷한 비판이지만 경청할 대목도 있다고, 그는 박홍규가 니체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봤다. 우선 니체는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니체 자서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이 대목에서 박홍규는 얼음으로 덮인 산 정상에서 고독을 기꺼이 감수하며 삶의 모든 것을 탐구하는 철학자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라고 각자도생의 삶을 부추길 수 없다. 니체의 문학적 표현을 법학자가 곧이곧대로 풀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독이며, 니체에 대한 비판이 지극히 도식적인데, 이는 니체의 철학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고.


손석춘의 비판에 대한 박홍규의 반 비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박홍규의 비판을 반민주주의자로 보는 흐름에 있다고 본 듯하다. 손석춘과 박홍규의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손석춘이 니체의 전체를 삶의 철학, 사회문화 차원의 논리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고귀한 사람을 질투하는 사회”에서 이렇게 썼다. 


“니체는 ‘자유 사회’의 인간은 한낱 ‘무리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며 ‘인간이 평등한 권리와 요구를 지닌 왜소한 동물로’ 퇴화하는 흐름을 ‘동물화’로 규정한다. 그것도 ‘왜소한 동물’이다. 영원회귀와 종말인을 경계 또는 경고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극복인이 되기를 호소해 온 니체로선 두 인간 유형 사이의 격차를 외면한 채 평등을 이야기하는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손석춘의 이어서 위대한 정치가 구현된 공동체에서 정신적 위계와 불평등을 인정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 니체는 ‘귀족적인 사회’를 제시한다. 이 대목에서 문구에 집착하면 니체는 귀족주의자요 반민주주의자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귀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 문장에 관한 오해를 해소할 수 있다고. “귀족이란 말은 종래 뜻한 바 보다는 훨씬 정신적인, 그리고 근본적인 뜻”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곧 고귀한 사람이 중심이 된 사회, 건강한 사람을 길러내는 사회를 이르는 니체식 표현이라고. 손석춘의 니체 읽기 혁명은 꽤 흥미롭다. 니체 애독가에게도 비판자에게도 새롭게 니체를 보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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