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난징의 독립운동가들 - 사진과 인물로 보는
장위안칭 지음, 박지민 옮김 / 공명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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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인물로 보는 “김구 선생과 난징의 독립운동가들”


말 한마디보다 한 줄의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는 “한 장의 사진” 그 안에는 장소와 시간, 분위기, 인물들의 복장, 얼굴빛과 표정이 다 담겨있다. 


이 책의 지은이 장위안칭은 원광대와 고려대에서 4년 동안 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청나라 (중화)민국시대 시사(시의 역사)와 대중소설, 그리고 현대 도시문화를 연구하는 전문연구자다. 책의 구성은 10장이다. 1장 상하이 흥커우공원 폭탄 투척 사건과 김구에서 시작하여, 김구의 구출과 보호,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난 김구, 그리고 난징에서의 비밀활동과 생활, 난징을 떠나다 등으로 이어지는 김구의 난징(南京)시절을 담고 있다. 


지은이는 난징에 있는 (중화)민국시대의 오래된 주택지역 푸청신춘을 연구하면서 자료 가운데 김구와 난징의 역사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돼, 김구의 난징시대를 연구해보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수많은 논저들 사이로 보이는 문제(치밀한 고증이 되지 않았음을 지적, 같은 책에서도 달리 표현하는 모순을 찾을 수 있다고) 아무튼 그는 난징의 도시역사라는 측면에서 접근, 난징이란 공간 속에서 김구를 들여다 보는 방법을 택했다.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던 “난징”이란 공간을 무대로 활동했던 김구와 이때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좇는다. 


난징의 푸청신춘 8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중대표단본부” 


2020년 상하이 주재 대한민국총영사관에서 난징시로 날아든 문서, 푸청신춘8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중대표단 본부라는 것이다. 2021년 9월, 지은이 등이 참여한 자리에서 8호가 아닌 10호가 대표단의 본부임을 입증했다. 같은 구역의 8호에 김구선생이 10호에 대표부본부가, 아무튼 10호를 대표부본부옛터라는 안내판이 붙게됐다. 항저우, 서호근처에도 임시정부가 100여일 머물다간 흔적을 보전하고 있다. 물론 안내판도 붙어있다. 


김구선생의 난징 피신을 도운 국민당 정부, “장제스”의 생각과 태도 


지은이는 1932년 홍커우 공원(현재 뤼순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일본의 수배를 받게 되자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피신해온 김구, 당시 중국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충격적이면서도 속시원한 쾌거였다. 김구를 찬양함은 물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인식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 사건 이후 국민당 정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도 대일합작으로 발전한다. 


중국국민당 역사와 장제스 연구 전문가 양텐스는 한국독립운동 인사를 지원하는데 장제스가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그의 저서<장제스와 한국 독립운동ㅇ의 아버지 김구>에 적고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중국국민당 인물이 세 명 있다. 첫 번째 천치메이, 두 번 째 쑨원, 세 번째 장제스로 30, 40년대 중국의 한국 지원활동의 주요 지도자이자 정책결정자이며 가장 오랫 동안 공헌한 사람이라고... 중국국민당은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여러 방면으로 포괄적인 지원을 하였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장제스는 한국 독립 망명인사들의 민족감정을 존중하고, 상황에 따라 정책을 즉시 조정하며 양국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렸다. 또 보자. 장제스는 전쟁 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자고 주장했고, 신탁통치와 남북 분할을 반대, 이 지역에서의 사리사욕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주장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강대국의 강권주의와 선명한 대비를 보인 것이다. 


천치메이, 천궈푸, 샤오정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오래전부터 한국 독립운동인사들과 교류했고, 상하이에 피신해있던 신규식 등에게 자금지원도 하였던 천치메이,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 천궈푸는 그의 조카였고 그 역시 한국 독립운동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만큼 개인적 감정도 있었겠지만, 지은이는 김구를 도우라는 장제스의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와는 다른 관점의 해석도 있다. 국민당정부나 임시정부 양쪽 모두가 우파 민족주의에 속하기 때문이며,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당권자라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일지 모른다고... 


지은이는 국민당 정부는 김구만 지원했던 게 아니라 김원봉도 지지하는 전략을 구사하는데, 김구는 당시 당권자는 아니였지만, 그를 지지함으로써 당권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게 주요했던 것으로 본다. 물론 이데올로기적인 접근도 한 원인일 수 있지만 핵심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구의 난징생활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김구 묘지를 참배한 샤오정


김구선생의 무덤을 찾은 샤오정(1905~2002, 윤봉길의사의거가 터진 후, 국민당정부는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온 그에게 김구선생의 보호업무를 맡겼다. 그는 후일 타이완에서 토지개혁과 농촌발전센터 이사장을 활동했다). 1973년 그는 건국대학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한국에 왔다.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 “내가 굳이 한국에 가서 학위를 받은 것은 사실은 고인을 참배하고 싶었기때문이었다.”라고 말하며, 샤오정은 시 한수를 지어 김구선생의 아들 김신장군에게 건넸다.


“백발이 되어서야 노영웅을 추모하러 왔구나, 나를 되찾기 위한 큰 공로는 과연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있을까, 40년 전의 그 고통과 고난의 길, 천추에 이어질 충절, 그 높은 기개를 우러러본다.”


김구와 샤오정의 관계는 단순히 명령에 따른 업무수행만이 아니었다. 샤오정은 한때 공산당활동 혐의로 조사를 받고 대기중에 천궈푸는 그를 김구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게됐는데, 자신이 다시 당내 활동으로 복귀할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였다고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다. 


우리가 몰랐던 사실, 중국측의 기록과 고증을 통해서 정확하게 밝혀낸 김구와 난징의 독립운동가들은 한국 독립운동 인사들 보다는 국민당 내부에서 어떤 연유로 김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됐는지를... 어딘가에 남겨진 기록이 대한독립의 아버지 김구의 면면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책은 아주 소중한 역사와 그 기록을 담고 있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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