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경석 - 김옥균을 깨우치고 대원군에 맞선 사내
김상규 지음 / 목선재 / 2024년 7월
평점 :
선각, 먼저 깨우친 예지력, 역매 오경석
오경석은 개항기 강화도조약 문정관으로 <삼한방비록>,<천죽재차록>, <양요기록> 등을 저술한 역관. 서화가, 금석학자. 그는 김옥균등의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옥균과 그들 중심으로 일으킨 개화파의 정변은 삼일천하, 그는 당대 외척세력의 중심이었던 장동 김 씨(안동김씨 중 세력의 중심에 섰던 일가를 부르는 말인 듯)였다. 결국, 고종이 보낸 암살단에 죽는데. “이와타”라는 일본 이름으로 조선의 칼끝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다, 상하이에서 죽는다. 김옥균에게 새로운 세계의 희망을 일깨워준 이는 오경석이었으며, 그의 스승이었고 3.1만세 운동의 33인 중 한 명이었던 오세창의 아버지였다. 오세창은 독립운동가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됐지만, 그의 나이 40 무렵에는 친일파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을 했던 적도 있었다.
오경석, 그의 평가를 두고 작가는 강화도조약을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고, 일본의 조선 침략의 교두보라는 시각만이 유일한 건 아니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저질렀던 오판 또한 냉정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고, 이른바 이데올로기보다는 당대의 정세를 열린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지기 쉬운 맹목적 애국과는 또 다른 무엇을 봐야 한다고, 오경석이 가졌던 유일한 소망 “조선이 화륜선을 보유하는 것”, 화륜선이란 침략의 상징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오경석, 역관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중국의 현실을 봤다. 개방과 문명, 진취와 발전의 상징으로 “화륜선”을 바라봤다.
강화도조약의 뒷이야기
일본과의 협의를 위해 조선 조정에서는 문정관(問情官=조사관), 별정역관으로 사역원 당상 오경석을, 통역관으로 왜학운도 현석운을 보내는데, 강화도조약 체결 23일 전, 제물진에 들어온 닛신함에서 일본 외무성의 모리야마 시게루에게 한 말,
오경석은 “신미년 미국 함선이 내도했을 때 대원군이 마침 전권을 잡고 있었소. 당시 나는 대원군께 도저히 외교를 열지 않을 수 없음을 설득하려 했소. 그런데 미국 선박은 겨우 몇 차례 발포하더니 물러가 버렸소.” “그러니 형세로 볼 진데, 귀국 대신이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곧장 상륙해서 힘을 과시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되오. .... 이번 일로 차질이 생기면 실로 만민이 도탄에 빠지는 고통을 초래할 것이니, 내 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렇게 내부사정을 폭로하는 것이오.”라고 외교상식을 넘어선 발언을 한다.
오경석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중국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은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서구열강과 교류한 일본, 우리는 일본을 통해서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소설 첫 대목에 나오는 오경석의 상상 초월의 폭탄 발언, 김옥균이 그를 스승이라 불렀고, 승려 출신의 일본 유학생 이동인도 함께했던 개화파….
소설은 오경석의 연대기다. 49살에 괴질로 죽을 때까지…. 작가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했고, 개항과 열린 외교만이 조선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오경석은 쇄국정책을 밀고 나가는 대원군과 대척하면서, 개화파에 합류했는데….
오경석은 개화사상가?
이상적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다. 집안의 분위기로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했다. 1853년 북경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서 이듬해 3월까지 머무르며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을 관찰, 그 뒤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책을 사들여 연구, 1853∼1859년경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 때, 서양 열강의 근대적 무력과 경제력 앞에 붕괴하는 중국의 참상을 보았다. 조선에도 곧 서양 열강의 침입에 의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절감한 오경석은 중국에서 사 온 책을 친구 대치 유홍기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개화사상을 개진하여 유홍기의 개화사상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박규수가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위문사절의 부사로 중국에 갔다가 큰 충격과 위기의식을 안고 돌아왔다. 이때 박규수의 개화사상 형성에도 오경석은 큰 도움을 주었는데, 소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 때 석파 이하응(대원군)이 친 "난"을 중국의 문화계 인사에게 가져다 의견을 묻는 등, 이하응과도 가까이 지냈던 사이였지만 조선의 미래를 보는 눈은 전혀 달랐다. 직접 눈 앞에 펼쳐진 중국의 현실이 미래의 조선의 모습일 것이라는 오경석의 혜안은...
우리 역사 속에서 일본의 역할을 두고, 조선을 합병한 식민지로 만든 일본 제국주의자의 침략행위와 지속해서 일본의 이익을 얻기 위해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것이지, 조선,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국운이 다해가는 조선의 위태로운 순간에 오경석의 생각은 옳았던 틀렸던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반일종족주의라는 폄훼, 친일파청산을 방해한 이승만을 독립운동가라고 말하는 것과 조선의 근대화와 오늘날의 경제발전에 일본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나 시각은 (이영훈을 비롯한 이른바 낙성대 무리), 단순히 친일파 논쟁으로 그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구한말, 조선말, 개화사상을 가졌던 이들은 어떤 논리로 조선의 개화와 문명, 진취를 고민했던 것일까, 아마도 이 소설은 이런 궁금함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겨주는 게 아닐까 싶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