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리뷰오브북스 14호
한승훈 외 지음,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부 엮음 / 서울리뷰오브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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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북 “믿음, 주술, 애니미즘”과 “고전의 강”


창간 준비호에서 시작, 열다섯 번째 발행된 “서울 리뷰 오브 북스”(2024.여름호)의 특집 리뷰 “믿음, 주술, 애니미즘”(6편의 리뷰)과 새롭게 들어선 ‘고전의 강’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고전으로서 꼭 읽어보고 생각해봐야 할 책을 다루는 코너, 그리고 이마고 문디와. 북&메이커에 실린 서평 4편(이승철 “사소한 것들의 힘”<경계를 넘는 공동체>, 김지훈의 영화이론과 영화, 물질적 유령, 홍제환 북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박진호의 한 언어학자의 삶을 통해 본 남북분단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고전의 강 “도덕은 왜 유전자와 싸우나” 2003년에 번역된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 등이 실려있다. 


2019년 영화<곡성>과 2024년 영화<파묘>는 한국의 무당과 일본 음양사의 대척 혹은 대립 구도다. 이들 영화의 배경은 일본의 전근대 악이 자리한다. 전자에서는 우리 땅 지킴이(산신령), 후자는 무당과 지관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정령이다. 우리 것이 아닌 남의 땅의 것이다)의 혼령과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맥을 끊으려는 쇠말뚝, 악질 친일파의 후손들은 그냥 부자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살지만, 묫자리 수가 좋지 않아 죽음의 그림자가 일가를 따라다닌다는 데서. 이 영화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글쎄다, 설정 자체가 한일관계의 해묵은 것들이 아직도 한반도 곳곳에 정령으로 남아있는 건 아닌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인지, 


특집 리뷰는 믿음, 왜 이상한 것을 믿는지, 무당, 여성, 신령들, 한국 무교의 문화인류학, 최창조의 한국의 풍수 사상과 인간 공양을 했던 상나라 정벌의 고대사, 애니미즘의 세계 등이 실려있다. 어느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종합선물상자처럼 여겨지는 서리북, 지난 봄호에서는 특집 리뷰로 “민주주의와 선거” 지역당 건설의 문제가 흥미로웠지만, 이번 호는 모든 리뷰가 다 흥미롭다.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새로 나온 책들까지 모두 훑어보고 책을 주문하고. 아마도 이번 호는 서리북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듯하다. 적어도 나에게서는 말이다. 


무당, 풍수, 미신


한승훈은 “지적대상으로서의 기괴한 믿음”이란 제목으로 이창익의 <미신의 연대기>를 리뷰했다. 음과 양, 과학과 미신, 바로 그사이에 존재하는 무당,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잇는 특수한 능력자들이다. 파묘의 지관은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에게 풍수는 종교이자 과학”이라고, 모르는 것은 신비하다. 묘하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뭔가 절대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인지조차 모른다. 신비한 현상, 물론 여기에는 사람들의 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기꾼들이 끼어들 여지가 충분하다.


또 보자, 오성희가 쓴 “여성 인류학자들이 만난 무속의 현장들”은 로렐 켄달<무당, 여성, 신령들>과 김성례의 <한국 무교의 문화인류학>을 통해서, 전자는 경기 북부에서 후자는 제주도에서 4.3을 통해 여성들의 삶이 중심이 되는 무속 민족지, 켄달은 전통가옥,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는 1970년대의 경기 북부를, 


김성례는 1980년 중반 제주를, 굿판은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장으로 기능을 할 수 있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굿판에서는 이들이 돌아와 증언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무당의 입을 통해서, 영화<혈의 누>에서처럼, 억울한 죽음을 사람들 앞에서 밝힌다. 나를 죽인 건 누구라고. 무속은 무교가 되고, 일제강점기 때, 민간신앙을 낮춰 부르던 무속을 무교의 반열로 되돌려 놓는 작업 또한 필요해 보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다양한 종교를 믿는 가운데서도 무교의 실천이 그들의 삶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김성례의 제주 무교는 그곳 여성의 자아정체성을 구성하는 언술행위로 봤다. 4.3사건으로 희생된 원혼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공표하는 장으로 굿판이 기능하며, 이들의 죽음과 관련된 역사를 회복하고 이에 대한 민중 기억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것이 무속이든, 미신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시원스레 토해내는 정화의 장이 굿판이다. 


최창조의 풍수, 도선국사의 자생풍수, “어머니로서의 땅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중국의 이론 풍수, 즉 죽은 자의 묫자리를 잘 써야 후대에 복이 닥친다는 믿음(아마도 조선왕 중에서 세종의 묘터가 그러했던 것으로 전해져, 문종이 죽고, 그의 장자인 단종이, 세조의 장자가 죽어 나가는 비극의 전승), 살아있는 대원군 이하응은 아버지 남연군의 묫자리를 명당이라 칭하던 그 자리에 슬그머니 묻었다. 이러한 연유로 운이 틔어 그의 둘째 아들이 고종이 됐다는 말이다. 최창조는 지리학자이면서 자생풍수를 연구하는 외로운 연구자였다. 죽은 사람을 위한 풍수가 차가운 이론이었다면 그의 풍수지리학은 어머니로서의 땅에 대한 사랑, 즉,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통풍이 좋고 양기가 서린 땅을 즉, 양택을 찾는 것이다. 


대학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풍수 연구자로서 삶, 풍수를 떠나 그의 연구자로서 열정과 책임 굳은 신념이 오히려 존경스러울 뿐이다. 풍수와 현대 지리학 사이에서 풍수를 현대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던 그의 이중전략, 죽은 선조의 유해와 후손 사이의 감응에 관한 속신에 따라 오로지 후대의 영달만을 노렸던 음택 대신에 도읍지, 마을, 주택의 입지를 고르는 양기, 양택 풍수를 “학”으로, 


특집 리뷰 외에도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샹바오<경계를 넘는 공동체>(글항아리,2024)는 베이징 저장촌 생활사다. 900여 쪽의 방대한 책, 베이징의 호적법을 넘어서 저장성 원저우 출신들이 그들의 집단 주거, 생산, 사업, 소비공간인 “저장촌”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어떻게 탈법과 불법의 외줄 타기를 하면서 중국사회의 개방, 개혁의 물결 속에서 베이징에 10만 명이 활동하는 그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었는가를 추적하면서 네트워크와 관계에 주목했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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