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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근후 지음 / 책들의정원 / 2024년 6월
평점 :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지은이 이근후 선생의 이 책<인생에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은 90대의 정신건강과 의사로서 또, 현자로서 삶의 깊이에서 나온 사유와 지혜를 바탕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법을 말한다. 인생은 늘 기대할 게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기대를 저버리는 순간, 인생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생물적인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래저래 변명처럼, 사회 경제활동의 장에서 은퇴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나만의 인생을 즐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생활고에 밀려 접어야 할 때도,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하기도 한다.
아마도 사회 경제활동을 할 때 우리는 짓누르는 부담, 의식적, 무의식적이든 나를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아오다 불현듯 삶이 헛된 건 아닌가, 나는 잘살아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지은이는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런데 우리는 닫힌 문만 바라보느라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라는 헬렌 켈러의 말을 인용하면서 스스로 포기하기 전까지 닫혀버린 삶이란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삶이 헛되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온다는 제목으로 어찌 우리는 죽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들처럼 구는가를 비롯하여 영원한 상실감에 대하여, 죽음 앞에 담담한 사람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다면, 왜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을까 등이 실려있다. 2부, 백만 가지 참견 속에서도 끝끝내 ‘나’로 살아가리에서는 부주의한 칭찬과 경솔한 비판으로 비롯하여 당신은 누구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사는가라고 묻는다. 나를 평가하는 당신은 나를 얼마나 아는지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보기, 나는 누구이냐는 물음이 필요하다고, 3부 인생이란 길고 긴 터널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을 담고 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스스로 나는 누구일까, 내 인정욕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른바 자기 성찰을 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나이를 먹다 보면 나를 소개할 말이 점점 사라져 간다고, 젊은 시절 나에게 뭐 하는 분이냐고 물으면 나는 의사나 교수 아니면 한 집안의 가장이라고 답할 수 있었다. 이제 이름 석 자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람에 따라 꽤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나는 문교부 장관이라는 어느 분교장 선생의 사례를 소개한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었고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다가, 갑작스레 찾아온 상실감은 이렇게 이상행동으로 나타나기도,
어찌 우리는 죽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들처럼 구는가?
죽기 살기로 일만 한 사람에게 한 처방, “퇴근은 6시에” 어쩌면 3, 8 법칙이다.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은 가족과 함께든, 나를 위하든 시간을 쓰라고, 과로사 직전까지 자신을 몰고 갈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아니다. 8시간 이상의 일에서 헤어나지 못한 일 중독에서 해방될 시간이 없으면 우리 몸은 계속 중독상태가 놓이게 되니, 의식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하라는 말이다. 이 대목에 딱 들어맞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말 “야심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커다란 행운과 재물이 굴러들어 올 것이라 믿기에 늘 무엇인가를 뒤쫓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지 피로와 분주한 나날뿐이다.”라는 문구다.
죽음 앞에서 담담한 사람
수양이 깊은 종교인들도 그가 미리 아는 죽음 앞에서는 고통스럽다.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온 것인가, 미련이 남는다.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는 일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은 어떻게 멋지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성철 스님도 스스로 자신의 죽을 날을 정해서 그렇게 가지 않았는가, 지은이는 죽음 앞에 담담한 사람이란, 자신이 죽었을 때,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열심히 산다면 이 또한 좋은 게 아니겠냐고 말하는 듯하다.
이 책 속에 담긴 많은 이야기는 참인생을 살기란 어렵기도 쉽지도 않다는 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나”답게 살라고, 누구에게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누군가 기대하는 삶에 맞추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준다.
내 불행은 남의 탓, 주변의 불행은 내 탓이라는 사람들
내가 불행한 이유가 남의 탓일까, 아니면 내 탓일까, 너와 나, 누구의 탓도 아니다. 열등감에서 나온 표현일 뿐, 내 탓이라는 가톨릭의 참회 방식도 아니고, 동양 사회에서 자식이 잘못해도 내 탓이요. 가족이 사고를 당해도 내 탓이라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환경 탓이고 부모 탓이라니, 아니다. “나”가 주인공임을, 이 대목에서 노자의 “자중자애”란 말을 되새겨보자. 즉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나를 모르고 어찌 주변을 그리고 세상을 우주를 알 수 있겠는가?, 우선 내가 누군인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