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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공부 - 논어에서 찾은 인간관계의 처음과 끝
조윤제 지음 / 청림출판 / 2023년 12월
평점 :
사람 공부,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관계에 관한 인식“
책장을 펼치자 튀어나오는 세 낱말 충(忠), 서(恕)와 성(誠), 사람 공부는 이 세 가지 개념으로 풀이를. 우선 세상사를 생각나게 했다. 의사소통(意思疏通), 소통은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이란 뜻이다. 당연지사 아닌가 싶었는데, 이 소통이 사회적 “화두”로 급부상했던 때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명박 정권 시대쯤으로 기억한다. 물론 예전에 소통에 관한 셀 수 없는 고전 속 문장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던 듯하다.
왜 소통이 문제일까?,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 도저히 그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진짜 막힌 사람이다. 소통이 되질 않아라고….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아닌가, 기실 이런 현상의 진원(진짜 원인)은 사람 관계다. 왜 막힐까, 청자(듣는 사람)는 화자(말하는 사람) 이야기가 자기의 가치 기준으로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라서, 화자의 융통성과 청자의 융통성의 범위 즉 사정거리의 차이일 수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이유를 톺아보면 맨 밑바닥에 깔린 것이 청자와 화자의 관계다. 50센티미터 이내에서 말할 수 있는 관계인가, 즉 친밀하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이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소통을 잘할 수 있다는 말은 고전(古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관계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늘 변함없이 보이지만 자기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내외적 환경에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받는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믿음‘ 혹은 ”신뢰“의 정도라고 받아들인다. 이 역시 사람과의 관계다. 관계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일방적일 때 나오는 말이 위와 같은 표현들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는 발화 속에서 그런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과 신뢰, 충성, 꾸준함, 이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알려면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논어“다.
지금껏 내 삶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다툼’과 ’버팀‘,’치열함‘의 연속에서 나를 찾기
지은이는 어떻게 하면 소통이 가능할까, 즉 관계, 그것이 믿음이든 신뢰든 적어도 헛수고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배반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 관계,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를 고전 속에서 찾아보려는 시도가 바로 이 책<사람 공부>값 아닐까 싶다. 부제, 논어에서 찾는 인간관계의 처음과 끝, 고전 연구가 조윤제 선생이 논어에 나오는 인간관계를 열쇳말로 정리한 것인데. 충(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우다), 서(恕, 모든 인간관계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성(誠, 꾸준한 사람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이런 세 관점으로 논어를 읽는 방법도 꽤 흥미로울 듯하다. 고전은 지식의 보고(寶庫)란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지 싶다.
길을 잃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인간 공자가 마지막까지 탐구했던 삶의 주제 ”사람“
충(忠), 충간의담(忠肝義膽: 진실한 사람은 의롭게 살 준비가 되어 있다)
격이 있는 사람은 일상의 배움을 즐거워한다는 말, 재주로는 꾸준히 쌓은 실력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 딱 와 닿는다. 요즘 이런 사람이 많기에 이 책을 읽는다면 그러지 않았을 터라는 순진한 생각도 해본다. 마흔은 흔들리지 않는 어른의 시간이다(不惑). 또 기억해두자 뜻하지 않는 고난이 더 나은 나를 만든다. 하나님은 당신을 세상을 위해 크게 쓰기 위해 고난과 시련을 준다는 것은 놀랍게도 어느 목사의 설교 구절과도 같다. 이렇게도 통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증명할 기회이기도 하다.
옛것은 창의적인 배움을 얻는 기회다(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이(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는 말인데, 요즘 창의적인 것, 핫한 것을 찾는다. 이른바 크레이티브 한 것을.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알고,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는 말과 통하는 것인데, 조선의 정조 뜻풀이를 한번 보자. 정조가 온고이지신이란 무슨 말인가 하고 신하 이유경에게 묻자, 그는 옛글을 익혀 새 글을 아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초학자는 이렇게 보는 수가 많은데, 대개 옛글을 익히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어 자기가 몰랐던 새로운 것을 더 잘 알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창의적인 배움은 즐거움을 준다는 말, 고전을 읽으면서 아하. 하는 감탄 수준에서 그치면 그 안에 담긴 뜻을 찾고 내 것으로 만들어 자기 일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 보고의 바닷속에서 걷어 올린 진주는 바로 이 대목이다. 문제해결을 위해 이 궁리 저 궁리 온갖 궁리를 하다가 순간 뇌리를 스치는 번뜩이는 지혜, 이런 현상을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에서 적은 재주는 꾸준히 쌓은 실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요행과 재주로는 어느 정도를 이룰 수 있겠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실력이 없다면 사상누각, 모래성과 같이 외부의 힘으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말 것이기에.
같은 책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행간의 뜻까지 이해하는데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문자대로 그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한다. 설령 얻었다 하더라도 이런 깊은 뜻이있었구나 하는 감탄으로 끝난다면, 말로 물고기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낚싯대라는 도구를 써야 물속 고기를 잡을 수 있듯이,
서(恕)와 성(誠) 또한, 이렇게 읽고 혼자서 새기며 제 것으로 만드는 일, 사람 공부란 그저 문장 속의 들어있는 문자가 아니라 책 속에서 책 밖으로 뛰어나오는 그 무엇인가가 바로 배움이다. 사람 공부란 이렇게 쉽지 않다. 그러기에 여태껏 공부를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 배움, 세상살이, 관계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