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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할 권리 ㅣ 책고래숲 8
최준영 지음 / 책고래 / 2023년 9월
평점 :
앉아서 기다리는 복지여서는 안 된다
이 책<가난할 권리>의 지은이 최준영은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당선됐다. 2005년부터 노숙인, 미혼모, 재소자, 여성 가장, 자활참여자 등과 함께 삶의 인문학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호를 얻기도 했다.
성프란시스대학(노숙자 인문학 과정)에서 가르치기도, 아무튼 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다.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누구의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패배자요 시대와 이 사회의 악, 처리되어야 할 쓰레기 취급을 받는 이들에게도 권리는 있다. 이른바 가난할 권리다. 즉,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걸맞은 인간의 권리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이 말의 존엄함을 이 책에 담았다. “넘어진 자는 반드시 바닥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성프란스시대학)
이 책의 구성은 3부로, 1부는 가난할 권리, 가난보다 더 서러운 “가난의 대물림”을 이야기한다. 2부는 희망의 인문학, 3부는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복지는 그저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복지여서는 안 된다. 동정이 아닌 권리로서의 복지를 이해하도록 쉬지 않고 설명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가난할 권리’다.
거리의 인문학
노숙인, 사람이 없는 사람들, 빚쟁이에게 쫓길까 봐, 사업에 실패하고 부끄러워서, 저마다의 이유로 사람과의 관계가 다 끊어진 사람이 그들이다. 살 권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연결해주는 것이다. 관계망이 존재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어떻게 하든 삶의 활로를 찾고 행복을 추구한다. 거리의 인문학은 이들 노숙인의 곁이 되어 주는 일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음”을, 유튜브에 이런 영상이 올라왔다. 사회실험 영상, 노숙인에게 다가가는 한 남성, 자기 동생이 지금 중병을 얻어 병원에 있는데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러자 노숙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어디론가 갔다가 다시 온다. 그리고 한 남성에게 돈을 건넨다. 내가 모아놓은 돈은 이것밖에 없지만, 수술비에 보태쓰라고. 남성은 웃으면서 실험 영상을 찍는 중이었다고, 당신의 착한 마음에 보상이라며 수백 달러를 그의 손에 쥐여준다.
노숙인은 삶을 포기하고 마구잡이로 닥치는대로 살아가는 미래 희망이 없는 하루살이 인생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할 뿐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할 뿐이다. 아직 바닥을 짚고 일어설 결심이 서지 않았을 뿐이다. 외형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 차별과 편견, 혐오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모습이다.
우리 시대,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안의 편견, 암묵적 편견에서 벗어나자고, 노숙인 등 우리 사회가 불가촉천민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달라고, 그들도 때 빼고 광내고 말쑥하게 차려입으면 우리 이웃이라고, 이들이 누군가를 대상으로 사기 치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위장할 마음이 없기에, 거꾸로 이들은 사회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건 역설 아닌가,
보육원에서 만난 꼬마 시인 이야기 ? 오만 원-
보육원에 찾아온 사람들이 아이들 손에 쥐여주고 간 돈들, 보육원 아이들은 개 한 마리를 산다. 그 개 이름은 10개도 넘는다. 초등학생인 꼬마 시인의 시, “오만 원” 덕분에 개 이름은 오만원이 됐다. 나는 집에 가기 싫다'로 시작한 시는 이젠 집에 오는 게 즐거워졌다. 오만원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만 원 주고 샀으니까 이름이 오만원이다. 나는 오만원이 좋다. 나를 마중 나오고 같이 산에도 다닌다. 친구들도 나를 부러워한다. 나는 이제 외롭지 않다. 겁이 나지도 않는다. 나에겐 오만원이 있기 때문이다. 오만원은 엄마나 마찬가지다.
가난할 권리, 인간의 권리
지은이가 지역 자활센터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던 때의 일, 매월 1만 원씩 강좌가 끝나면 수학여행 가기로 했다. 그때 수해 속보와 함께 어이없는 소식이, 해당 지자체장이 골프를 쳤다고, 해외여행에 나섰다고, 과연 누가 부자인가?
성장 이데올로기 국민은 국가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국민은 그저 개조의 대상이거나 소모적 수단일 뿐이다. 국민이면서 주체가 아니었던 터라 성장의 과실은 고스란히 소수의 권력층과 그에 편승한 기업들의 차지가 되고, 국민 일반은 철저히 소외됐다. 산업화가 낳은 병리가 소외이며, 가난과 불운과 불행의 구조화 혹은 내면화로 이어졌다. 이제 국민은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알아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국민은 선진국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게 됐다. 알아서 제 밥벌이를 못 하는 국민은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
지은이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너무 상식적인 너무 형식적인, 너무 무식한, 너무 관료적인. 너무 외형적인, 난 “복지”대상자라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이 진실이든 뭐든 우선 조치를 해주겠노라 하지만, 구질구질한 차림에 냄새라도 풍기며 복지지원을 신청하면, 힘든 사람 코스플레이를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조차, 이게 어찌 된 현상인가, 복지는 찾아 나서는 것이다, 앉아서 기다리는 게 복지가 아니라는 말만 확실히 해두자.
성남 세모녀 자살 사건, 복지사각지대라 연일 떠들어 댄다. 지금도 복지홍보방송에 나온다. 연락하라고...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나서라, 연락을 못할 수도 있는 사람이 있으니...
거리의 사람들,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관계를 원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해주면 함께 헤쳐나갈 용기와 격려를 해줄 이웃이 필요하다. 동정이 필요한 게 아니리라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대왕이 현자를 찾기 위해 디오게네스의 통 집을 찾았다. 디오게네스는 왕이시여, 나는 지금 햇볕이 필요하니 빛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왕의 제안을 이렇게 거절했다. 왜 내가 통에서 살면 안 되는데, 누군가 그 이유를 알려주오... 디오게네스라서 통에 살아도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노자는 자기가 세상에 가장 귀한 존재라고,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너 자신이라고... 부자될 권리나 가난한 권리는 자기 선택인데...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