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 세계사편 숙청의 역사
최경식 지음 / 갈라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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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의 역사, 세계사편

 

숙청(肅淸: 조직 내에서 반대파를 제거함)의 역사는 어찌 보면 권력 세계의 명암이 아닐까?, 유방과 한신, 한나라 세웠으니, 이제 그 경쟁대상자가 될 법한 세력을 제거해야, 한신은 그의 참모로부터 유방을 치자고 그렇지 않으면 후일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는데, 그는 단호하게 내 재능을 알아보고 나를 거둬 준 이에게 지켜야 할 의리가 있다고,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고, 사냥이 끝나면 사나운 사냥개는 괜히 문제만 일으킬 뿐, “토사구팽”이란 고사성어의 탄생이다.

 

숙청은 필연, 혁명의 명암, 대척점이 숙청

 

이처럼, 숙청이란 필연적이다. 그 규모가 크든 작든, 권력(勸力)이란 인의(仁義)에 따라야 인은 너그러움이요, 의는 정의라 정의는 시대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지만, 인은 그저 너그러움이다. 권력은 본디, 너그러움과 정의를 함께 갖는 것으로, 그 안에는 저울추가 있다. 늘 헤아려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하라는 것인데, 때때로 병통을 일으킨다. 권력은 평평하지 않고, 최고의 정점이 있는 피라미드라고, 그래서 경쟁자, 혹은 경쟁자가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함께 동고동락했던, 혁명의 동지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될 뿐이고, 제거하는 것이 “숙청”이다. 혁명의 역사는 대척에는 “숙청의 역사가 존재한다. 혁명(개혁이든 뭐든, 새 질서형성)은 곧 숙청의 신호탄이다.

 

절대권력을 향한 공포의 정치학- 프랑스, 독일, 소비에트연방, 중국, 칠레, 태국, 북한, 이란

 

지은이는 좋은 숙청과 나쁜 숙청을 구별하자고 한다. 하나 어떤 의미이건 숙청이란 이미지는 권력투쟁에서 정적제거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는 느낌이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역사가들의 업이겠지만, 좋은 숙청은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고, 나쁜 숙청은 그 반대라는 흑백논리로 뭉뚱그리기에는 성급하다. 역사란 늘 승자편의 것이기에. 이 책 숙청의 역사 세계사편은 한국사편에 이어 나왔다.

 

이 책에서는 프랑스혁명, 단두대와 공포정치의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하여 히틀러의 친위쿠데타, 스탈린의 대숙청, 드골의 민족반역자 숙청(이를 숙청이라고 해야 하나, 뉘앙스로는 처단), 김일성, 마오쩌둥, 피노체트, 폴포트, 호메이니, 덩샤오핑 등 10개 사례를 들고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단두대와 공포정치는 과유불급이다. 정치란 상대적이어서 절대권력을 지향하거나 이상향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반대를 ”공포”로 위협하면, 즉 도망칠 구멍도 없는 곳에 쥐를 몰아넣으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위한 험난한 과정에서 결정적인 한 방, 친위쿠데타 이른바 ‘장검의 밤’에서도 권력 앞에서는 친구도 소용없다. 마치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을 살려두자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알아서 대전에서 소란을, 들고 일어난 한명회와 그 무리처럼, 역사의 패턴이 비슷하다. 아니 보편적이다. 인정사정을 두는 순간 뒤엎어지는 것이기에, 하느냐, 마느냐 밖에 선택지가 없다.

 

이 책은 숙청이란 열쇳말로 묶기는 했지만, 정도의 다양성이 존재함을 염두에 두고 읽었으면 한다. 드골의 민족반역자는 숙청이란 표현보다는 처단이라는 느낌이 더 강한듯한데(한국의 반민특위사건에서는 친일파처단이라고 했다, 숙청이 아닌, 뭐 차원을 달리하기에 그렇게 쓴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렇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피노체트 이건 숙청이 아니라 CIA 정치 공작과 칠레군부의 인권탄압이다. 미국이 사회주의 칠레로 바뀌면 자국의 이익이 줄어든다는 점 때문에 한 나라를 뒤집어엎는 파렴치함을 보인 사례다. 피노체트는 어떻게 미국의 주구가 된 것인가, 그다음으로 태국을 킬링필드, 죽음의 벌판을 만들어버린 폴포트,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사상은 무엇이었던가?, 이는 숙청이 아닌 인간사냥이다. 이로 인한 베트남과 중국의 대립, 미국의 개입, 한 나라의 운명을 뒤바꾼 것이다.

 

천안문 사건은 "인민 학살"

 

덩샤오핑의 천안문광장은 숙청이 아니라 인민학살이다. 중국판 5.18이라고 한 지은이, 국가사회주의 건설, 개방, 개혁, 흑묘백묘론의 한계와 모순이 드러난 사건이다. 자본주의식의 생산체제를 경제특구 방식으로 도입했던 어쨌든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공산당원의 부조리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해버린 것 자체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천안문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부의 편재와 양극화의 조짐은 공산당이 초심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보살피고 배려하며 존중해야 할 인민이 피지배계급이 되어버린 모순 때문에 생긴 사건이다.

 

유학의 나라, 중국, 권력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했을 사람들이 없다는 말인가, 스탈린의 대숙청, 이 역시도 말살이다. 편집증으로 정적 트로츠키를 제거하고, 그 잠재적 경쟁자가 될 동고동락했던 동지들에게 반혁명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해버리는 것,

 

이란의 호메이니, 신정국가 이란 건설이라는 목표로 이 역시 미국과 관련해서 살펴야 한다. 친서방, 친미, 수니파의 이라크 후세인과의 전쟁 등 역시도

 

이 책은 ‘숙청’이라는 열쇳말로 어떤 식으로 권력을 장악했는지, 장악과정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세계사 특히 권력투쟁의 흑역사라는 측면에서 꽤 흥미롭다. 칠레의 피노체트 편과 태국의 폴포트 편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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