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비극 - 차라리 공감하지 마라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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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공감하지 마라

 

<공감의 비극>, 강준만 선생의 공감론이다. ‘선택적 공감론의 비극’, 이 책에 서두에서 미국의 심리학자 폴 블룸의 <공감의 배신>에서 공감에 반대한다고,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며 우리는 공감이 없을 때 더 공평하고 공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이 말은 충격적이다. 솔직히…. 상담의 세계에서나 의사소통에서나 가장 기본인 “공감”을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과는 다소 접근법이 다름을 전제해두자.

 

공감이란 단어가 쓰임에 따라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공감에도 양면이 있는 모양이다. “공감 능력이 없다”라는 말은 소통을 못 한다는 말인데, 진보진영에서 더 많이 쓴다고. 공감 능력 결여 그 자체로는 역지사지도 못 하고, 배려도 못 한다는 말인데, 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공감의 두 얼굴>에서 공감은 자아 상실로 이어질 수 있고, 흑백 사고,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공감 능력의 결여가 아니라 공감 능력이 있기에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점차 알 수 없는 말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게 아닌가 싶다. 강준만 선생이 진정하고자 하는 말은 뭘까,

 

인지적 공감, 이성적 공감

 

공감을 한데 뭉뚱그리기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듯한데, 장대익의 논법처럼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구분해보자면, 내 편으로 끌어당기는 공감(구심력)과 밖으로 나가려는 이성적인 공감(원심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

심력이 아니라 원심력이라고.

 

즉, 내 편이 뭐라 하면 공감한다고 지랄할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널리 공감을 얻는 게 “공감”이란 것이다. 구심력이란 선택적 공감론을 의미하는 듯싶다. “화이부동, 역지사지”. 상대방의 처지에서 문제를 살펴보라고, 공감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님을….

 

이런 공감론을 키워드로 6장에 걸쳐 논하고 있다. 1장에서는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는 세워야 한다?, 신념은 소유물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왜 4류일까? 그 이유를 톺아본다. 2장에서는 정치인의 언어와 화법을 따져 묻는데, 윤석열 화법의 비극, 요즘 설화설이 나오는 안민석의 갈치 정치, 그리고 헛소리를 진실 아니 사실 헷갈리지만, 기자가 정치하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 반면교사 김의겸 사태, 폴리널리스트? 언론인이 정치할 때 뭘 주의해야 할까, 3장, 증오를 위한 공감인가? 감정이입보다는 역지사지가 좋다. 4장 바보야, 문제는 성격이야? 이준석의 선택적 공감론을 비판한다. 5장 위선과 사기가 난무하는 지방문제, 광장은 없고 밀실만 있는 지방 공론장, 6장 언론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 아무튼 강준만 선생의 글을 읽노라면 경계에서 논하자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공감의 양면성, 정서적, 인지적 공감의 구분법 등, 흥미로운 논설이 실려있다. “공감”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요즘 화두의 한 꼭지인 “지방소멸”과 관련한 5장을 한번 보자. 지방문제를 한마디로 지역균형발전 사기극이라고 규정한다. 지방소멸을 막을 최후의 카드는 ‘지역 정당’이다.

 

지방소멸을 막을 최후의 카드 지역 정당

 

2022년 6월 지방선거, 무등일보 기사 “어차피 민주당 후보가 될 것이 뻔한데 안 찍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심리”인 3월 대선에서 전국최고 투표율(81; 5%)을 기록한 광주가 불과 3개월 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37.7%로 절반 이상이 빠진 투표율을 두고 한 이야기다.

 

지은이의 분석은 첫째, 불투명 불공정으로 상징되는 민주당 경선과 공천만 받으면 끝이라는 안일한 선거운동을 했다고 국민, 시민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민주당이면 끝, 이렇게 국민의 선거권을 업신여긴 탓에…. 이 말에 공감한다 이 책에서 말한 원심력 공감으로. 지역의 분위기도 또한 그렇다. 둘째로 지적한 권리당원제의 문제 역시 그렇다. 셋째, 지역위원장의 계보정치가…. 넷째, 이미 기획된 선거판에서 싸울 의욕을 잃어버린 정치신인의 불출마로 무투표당선이. 다섯째, 머리를 수그리고 품 안으로 기어들면 봐주고, 대들면 밟아버리는 조폭 정치, 품앗이 공천, 일당 독점의 염증 유발 정치.

 

그렇다면 지역 정당이 왜 카드인가?

 

사석에서는 호남의 일당 독재에 대한 온갖 개탄과 비난이 난무하지만, 투표장에 들어가면 될 사람 찍자론이. 투표행태는 이미 밝혀진 바이지만, 왜 트럼프를 민주당원인 노동자층이 지지했는가? 라는 물음과 답이 호남의 경우에 딱 들어맞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투표결과는 반대였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결론은 모두들 지역발전, 지방분권을 입으로만 떠들지만, 사실 잿밥에만 관심있지, 지역소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지역의 공론장을 마련하기 보다는 밀실에서 지역을 주무르고, 또 지역을 외면한 중앙정치를 한다고 비판하는 정도로는 제대로 된 변혁은 어렵다.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지역에 착근하는 지역정당이 출현해야 한다. 물론 정당법, 선거법 등의 법개정이 필요하다. 산넘어 산이지만, 지역을 외면한 중앙 정치의 승리에 대한 집착이 자율성 회복의 노력과 열정의 씨앗마저 죽이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대체로 공감한다. 이 역시, 원심력적, 인지적 공감이다.

1장에서 6장까지 꽤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공감의 비극은, 메이라방의 함정이다. 유유상종이라고, 개혁 의지와 올곧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왜, 어째서 중앙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입성하면, 하루아침에 구케우언(구태의연한 케케묵은 어리석은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되는가, 그들의 머릿속에 지역은 없다. 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한단 말인지. 정치(政治: 바르게 되도록 회초리를 들어 다스린다)가 아닌 정치(正恥:정말로 치욕스러운)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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