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치료세계를 아십니까? -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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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VS윤정

 

이 책<정신분석 치료세계를 아십니까?>은 한 마디로 어려운 주제를 쉽게 말한다? 꼭 그렇지만 않은 듯하다. 정신분석이라는 자체가 주는 중압감, 독어를 번역하니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세계를 분석한다.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MRI로도 볼 수 없는 세계인데….

 

정신분석을 어렵게 느끼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정신분석학을 프로이트, 융, 라캉 등의 책들을 번역해 소개하면서, 10년 만에 정신분석을 했다. 말이 10년이지 얼마나 긴 세월인가, 그래서 아예 정신분석은 보통 사람과는 인연이 먼, 전문가 그들만의 세계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이부영의 칼 연구 또한 그런 셈이다. 

 

윤정은 정신분석치료의 주체는 오직 자신뿐이다. 또, 정신분석은 의학도 임상 심리도 아니라고 하면서 프로이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의 질서 속에서 무의식을 물었고, 라캉은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말하는 무의식의 주체(충동의 주체)를 물었다. 윤정은 “생명이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현상의 무의식 속에서 죽음의 생명을 묻는다고…. 여전히 헷갈리지만, 무의식, 무의식의 주체, 무의식 속에서 죽음의 생명을 묻는다, 

 

정신분석치료는 증상만을 완화하는 치료가 아니다.

 

정신분석 치료는 표면적인 증상만 해결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우울한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이런 환경변화로 사유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는 방식을 고치게 되면서 수선하는 치료가 아니라. 사유와 사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가지 않던 길을 가게 되면서,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치료 세계다. 

 

그렇다면 질병을 어떻게 보는가, 정신분석치료는 건강한 사람이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질병은 자신만이 살아온 사유와 삶의 방식 결과다. 정신분석현장은 고통 속에 머문 삶의 방식의 문제를 새롭게 방식으로 살면서 고통을 수용하는 사유와 사는 방식의 변화로 그 고통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그런 장면이다. 

 

모든 질병의 근원은 나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고통은 나를 직시함으로써 치유가 되기에 삶의 방식에 관한 새로운 이해, 고통을 수용하는 자세와 사유가 자연스럽게 고통스레 지워준다. 

우리가 쓰는 정신분석의 해석이란 말 또한 헷갈린다. 정신분석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의 해석은 의미를 잘라내는 일이고 무의미한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라캉의 무의식 주체, 충동의 주체

 

라캉은 정신분석이 상대하는 것은 질서적인 자아가 아니라 무질서적인 무의식을 상대한다. 자아는 상상적인 허구의 세계다. 라캉의 주체란 자아의 억압을 벗어난 무의식적 충동을 말하는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현장, 내면 풍경은 증상을 제거하여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의 실천 임상은 이상을 제시하고 요구하고 실천을 강요하지도 않고 인격을 교정,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주체임을 알아차리는 곳이다. 라캉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윤정의 현상의 무의식, 생명의 인간

 

이제 윤정의 정신분석 세계를 보자. 현상의 무의식은 ‘인간의 생명’보다 ‘생명의 인간’을 말한다. 그는 인간의 생명이라는 인본주의적 토대를 거부한다.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며 유일종으로 생명체를 다루는 인본주의로는 더는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꿈꿀 수 없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많은 학자의 견해와 같은 맥락의 주장이다. 

 

아무튼,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생명은 ‘생명의 인간’으로 전복시키고 잃어버린 상실과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의 공간에서 말하는 주체는 생명의 인간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내 안에도 사회 안에도, 역사 안에도 우리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의 영역에서 생명 놀이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자 한다.

 

‘생명의 인간’은 잃어버린 것과 채울 수 없는 공백 속에 새로운 사유를 선택하여 사는 방식을 새롭게 하여 살고 싶은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 이런 사유가 좀 더 자유로워지려면 모든 사유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윤정은 보는 것이다. 

 

그의 정신분석은 자연의 파괴적 공간, 명령과 금지로 억압시키는 문명적 공간, 그 이중적인 공간에서 상실과 결핍은 말하는 주체로 사는 삶을 상실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언어의 환상 속에서 살아 낸 ‘생명의 인간’이 머문다.

 

라캉과 윤정, “무의식의 주체”와 “현상의 무의식” 라캉의 그것은 충동의 주체이고, 윤정의 현상의 무의식은 인간의 생명이 아닌 생명의 인간”을…. 알 듯 모를 듯한 이 논설은 한 번 더 되새겨봐야 한다. 윤정은 우리가 이제껏 사유했던 모든 것들 재편하라고, 인간이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라는 독선과 오만에서 벗어나, 종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연의 파괴공간과 명령과 금지로 억압시키는 문명의 공간에서 말하는 주체로 사는 삶을 상실시킬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에는 생명의 인간이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고 또 읽는 시간이었다. 과문한 탓인지 라캉과 윤정의 정신세계 분석 비교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맥락은 어렴풋이 이미지를 만들어 볼 수 있을 듯하다. 

윤정의 이론 이해를 위한 책들도 다수 나와 있으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련다. 

 

 

<출판사에서 보내 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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