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와 함께 프란츠 파농 읽기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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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박홍규의 눈은 예리했다.

 

이 책<카뮈와 함께 프란츠파농 읽기>는 비교문학이 아니다. 카뮈는 우리 사회에서 대체로 알려진 유명인이지만,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저자 프란츠 파농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지은이는 카뮈와 함께 파농을 읽자고 권한다. 왜 함께 읽어야 하나, 물론 알제리독립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이를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들을 아나키스트로 본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에서 카뮈나 파농에 관한 책에 알제리나 마르니티크의 역사를 비롯하여 두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상식에 관한 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끼리 선문답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을 대중 이해 차원으로 끌어내려 교양의 영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카뮈와 파농은 알제리를 사랑했던 공통점이 있다...방식은 다르지만,

 

이 책의 관점은 이런 것이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이자 20세기 지성으로 알려진 알베르 카뮈, 흑인성을 연구한 탈식민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인 프란츠파농

우리는 이들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알제리를 사랑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식민지 해방의 소극적이었던 카뮈, 적극적이었던 파농, 아나키스트에게 정부는 좋은 정부든 나쁜 정부든 정부는 없어져야 할 것인데….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의 공통점이 있었나, 있다면 무엇이고 다른 점 또한 무엇인가?,

 

카뮈의 마지막 소설 <최초의 인간>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 온 프랑스인이 알제리인을 일컬어 언제나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적이고 잔인한 적들로부터 알제리는 빼앗아야 할 땅이었다고, 또 언제나 시비 걸기를 좋아하고 냉혹한 그 사람들에 대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프랑스를 일본으로 바꾸고, 알제리를 조선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남의 땅에 쳐들어와서 제멋대로 해놓고 이에 항거하는 이들 때문에 방어해야 한다고…. 어불성설이다. 카뮈의 말은 이런 뜻이다.

 

카뮈의 이런 주장은 파농의 <대지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서 쓴 다음 대목과 비슷하다.

 

이주민은 역사를 만든다. 그의 삶은 화려한 신기원이며 일대 모험이다. 그는 절대적인 출발점이다. 이 땅은 우리가 만들었다. 그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우리가 떠나면 모든 게 사라지고 이 나라는 중세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병으로 쇠약해지고 대대로 물려받은 인습에 사로잡힌 굼뜬 사람들이 식민주의적 중산주의의 활약을 위해 거의 무생물적인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 이주민은 역사를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역할을 의식한다.

 

파농은 선주민은 정태적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비난이기도 하다. 파농은 그런 비난은 식민지 해방의 역사를 창조해야만 없어질 수 있고, 그래야만 새로운 최초의 인간인 선주민이 나타난다고…. 카뮈에 반대하는 파농,

 

이런 식으로 카뮈와 파농을 좇아간다. 이 책은 왜 이 책을 쓰는지(1장), 이 두 사람의 고향을(2장), 그리고 이들이 노동자의 아들로 성장하는 과정을(3장), 1940년대의 카뮈와 파농의 부조리와 차별 경험(4장), 1950년대 반항과 반란을(5장), 그다음으로 카뮈와 파농의 알제리 전쟁(6장), 이 둘의 비전-새로운 인간을(7장)….

 

21세기 카뮈는, 파농은

 

20세기 말 카뮈가 반대하던 공산주의는 끝났다. 그래서 후쿠야마를 비롯한 자유주의자가 이성의 승리와 역사의 종언을 주장하면서 다시 서양의 세기가 도래함을 예언했다. 하나, 이들이 말하는 자유주의를 위한 새로운 이론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 19~20세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는 여러 위대한 학자들이 제기해왔다. 최근에는 존 롤즈의 <정의론>,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는 개인에 대한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정의의 이론을 도출하려 한다. 이러한 지적 상황에서 지은이는 카뮈가 중요한 이유를 말한다. 그가 아무런 위안 없는 정치이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즉, 근대 이데올로기가 전형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어떤 보장 없는 정치이론을 보여준 점이다.

 

파농은 스스로 아나키스트라는 말도 마르크스주의자란 말도 한 적이 없다. 다만,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싸울 뿐이다. 그의 <검은 피부, 하얀가면>은 군대와 리옹에서의 파농 경험의 요약이다. 그는 자신이 포용하고 싶은 문화에서 소외됐다. 파농은 근대화 과정의 심리적 중요성을 강조하여, 문화의 르네상스는 의식의 변혁을 상징하고 자아의 해방과 그 사회해방의 전환점을 상징한다고 봤다. 그는 아프리카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창조물로서 영속적인 저개발을 조장하는 사회, 문화적, 정치, 경제적 국제체제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카뮈와 파농 제대로 이해하기에 집중하고 있다. 카뮈를 제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이들, 뭔가 제대로 알고 떠들었으면 좋겠다는 불편한 심경을 담고 있는 듯하고, 파농에 관해서는 그가 정신의학을 전공했다는 점에서 라캉식으로 정신분석학의 전문가로 만들려는 왜곡 또한 진행되는 듯하다고 경고한다. 아나키스트는 좌파로부터도 우파로부터도 배척당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편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는 생각인가, 적의 손에 들어가면 다루기 힘든 사람이 될 것이기에 그런가. 이미 고인이 된 이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박홍규 선생의 이 책으로 눈에서 비늘이 또 하나 떨어짐을 느낀다.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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