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의 뿌리, 전문 학교
김자중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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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학의 뿌리 ‘전문학교’

 

1876년 개항으로 조선은 서양의 신식문물이 대거 밀려온다. 단발령, 복식 등과 아울러 교육 제도에 이르기까지, 특히, 고등교육체제에 무지했던 조선, 갑오경장기(1894)에는 일본의 고등교육체제를 본뜬 전문학교 제도까지 검토한다. 한성주보는 정기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대학 제도를 소개하기도 한다. 대체로 초등-중등-고등의 3구분이 보편적으로 인식했다.

 

이 책 <한국대학의 뿌리 전문학교>는 지은이의 박사학위 논문과 갑오개혁기-1910년대를 다룬 논문을 바탕으로 썼는데, 핵심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내에서 설치된 고등교육의 정책-전문학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대학설립의 의도적 저지, 그리고 해방, 1945년 이후 미군정의 교육 방임(?) 흐름에 따라 전국에 생겨난 대학들(전문학교에서 승격의 형태로), 아무튼 일제강점기 일본의 대(對)조선 교육체제구상은 2구분, 초등-중등(고등학교, 전문 정도 학교)학교가 중심이며, 고등교육기관 설치는 설립재정, 재일조선 유학생(배일 등) 문제, 조선에 있던 일본인에 대한 교육 등을 이유로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내에서 고등교육기관을 둬야 한다는 견해나 나오기도 했다.

 

이 견해는 조선교육령에 따라 중등교육을 마친 자들은 비교적 체재 내 순응형인데, 일본 유학 등을 통해서 배일감정이 고조되어 오히려 반항적으로 되는 경향, 아울러 재조(선) 일본인에 대한 고등교육 문제 등에 대응하기 위해 전문학교 설치를 허가했지만, 이는 문화정치기에 이르러, 관리들의 조선부임회피, 의사 등의 전문직 역시 조선으로 오지 않으려 했던 것 등을 이유로 민족별입학정원(1/4은 일본인으로 한다. 당시 인구 비율에 따른 것이라면 1:50 정도였으니 정원 50명이면 일본인 1명만이 입학 가능할 텐데)을 조정 혹은 폐지(실력우선원칙- 실은 일본인의 입학을 늘림으로써 외형적으로 일본인이 조선인에 비해 우수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와 관립전문학교의 척식인력 충원, 즉, 조선 내 일본인을 교육해, 식민지 지배경영의 중추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바람을 타고, 늘 그런 사람이 있듯, 조선 내에 출세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의 관립의 지역 제1고가 명문으로 대두된다. 예컨대 지금도 교명이 남아있는 곳도 있다. 일본 내, 도쿄 외의 지역 3중학, 5중학 하는 식으로 교육구를 나눠서(-일본 8개구로 나누고 수위 관립학교명이 제0중학, 지역명을 표기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은행 등도 제일은행을 시작으로 16은행, 105은행 식으로 숫자를 사용했다. 우리 제일은행도 제1은행이다. 일본의 제일은행은 지금의 미즈호은행이다.

 

일본의 조선 고등교육에 관한 딜레마

 

식민지 지배경영에서 조선에서 똑똑한 인재들이 많이 나오면 식민지 경영에 문제가 생길 뿐이다. 제 이름자나 쓰고 산수 정도만 하는 기능인력을 늘리는 것이 편하다. 그러다 보니 학문을 하기 위해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을 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일본 유학 중에 사회주의에 눈을 뜨고 식민지 현실을 자각, 깨달은 이들의 배일 운동으로 기우는 경향이 나타났다. 일본은 이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일본 유학을 줄여야 하고,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조선 내 고등교육기관을 설치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즉, 실무교육 중심의 전문학교를 만들고 일본인이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일련의 정책들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전쟁기에 들어서면 이과계 증설 등을...

 

법률전문학교, 의학전문학교 등에는 변호사, 주판임관(판검사임용자격)시험에서 고등학교(구제도 중학), 전문학교, 대학의 예과 출신은 예비시험을 면제했다. 대학은 당시 경성제국대학밖에 없었으니…. 한편, 늘 부족했던 의사를 보충하기 위해 관립은 경성의학전문학교, 사립은 세브란스연합전문학교로 대표되는데(1920년 당시는 2곳 밖에 없었다), 경성의전은 출신은(처음에는 의료규칙에 따라 조선 내에서만 면허) 설립 7년 만에 일본 국내에서도 가능한 의료법에 따른 의사면허를, 세브란스연합의전은 개교 17년 만에 의료법에 따른 의사면허를 받게 됐다. 대체로 의사는 의전을 졸업하면 무시험을 면허했다. 즉, 어느 학교로 진학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니, 사립전문학교로서는 자격 등을 인정받는 데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지방에는 의학강습소만이라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평양과 대구만 생겼다.

 

지금 대학 문제를 이야기할 때, 다른 나라에 비해 왜 사립대학이 이리 많은 것인가, 이는 국가가 교육책임을 사립에 떠 넘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선의 역사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을 거치면서 이리 바뀌어 왔기 때문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사립대학들이 생겨났다. 전라남도민의 모금으로 설립된 도립대학 조선대학교, 이래 저래 사립학교로, 70~80년대 유명한 사건이 많다. 이런 사학의 역사들 또한 깊이 들여다 볼 일이다.

 

오늘날의 대학입시 경쟁의 최고정점은 서울대학이다. 이는 일본과 비슷하다. 이런 서열 구조화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의 교육 제도에 닿는다. 미국의 최고정점은 사립대학(하버드, 예일이니 하는)이다. 독일 등의 유럽은 국립이라서 서열, 줄 세우기로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구조 그대로 관립 아래 사립,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지방에 국, 공립, 사립대학이 생겼을 뿐 여전히 그 모습은 같다는 말이다.

 

상아탑은 우골탑이란 말은 이때부터...

 

전문학교 학비가 3원, 5원 의전 중 아주 비싼 곳은 60원, 자소작농의 연간 수입이 470원, 소작농 350원 정도였으니, 금방 계산이 나온다. 그래서 장학단체(여전히 친일파 주도로-식민지배 경영에 필요한 만큼)가 장학금을…. 아무튼 개천에서 용을 내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이 보인다.

 

학교 소재는 경성에 많았다. 지방 학생들은 유학을 해야 하는데, 1936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선인 재학생(1학년)의 연간 지출을 보자 466원이 쓰였고, 하숙비(10개월)가 180원이나 차지한다. 경성고등상업학교 재학생의 연간 지출 532원 50전~588원 중 하숙비가 220원 이상, 수원농림고등학교도 사정은 그러하다. 지출의 35~45%가 하숙비로 들어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역 간 차별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며, 각 지방 발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보면 한국대학의 과거가 보이고, 이를 따라가다 보면 일제의 대조선 교육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식민잔재 청산을 이야기하지만, 깊게 자리한 일제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한국대학의 뿌리가 일제강점기 전문학교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아주 귀중한 정보와 자료가 들어있다. 좀 더 들여다보면, 당시 교육기관의 지도라 할까, 분포를 알 수 있는데, 고등교육기관의 경성 집중 현상이 두드러지고, 중공업지대였던 북선(북한)에 기술 관련 전문학교가, 수산 등은 남쪽 부산에 자리했음을, 아울러 각 지방에서 의료관련 학교를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음도 엿볼 수 있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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