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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를 하는 마음 - 오해를 넘어 이해로
임민경 지음 / 아몬드 / 2022년 1월
평점 :
자해를 경험했던 임상심리전문가의 세상을 향한 고언 “자해를 이해해 주세요”
한국 사회에서 자해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2010년 후반의 일이다. 2018년에는 자해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리고 여러 시사 언론 매체에서 자해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게 됐다. 왜 이 시기에 그런가, 사회적 배경을 들어 설명하는 이도 있지만, 우선은 자해의 기능이 뭔지, 왜 자해를 하는 것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겠다.
도대체 왜 자해하느냐?
자해하는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자해는 보편적인 인간 행동에 속하지 않으며 분명 어느 정도 병리적이지만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은 아니다. 단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방법이 자신을 해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자해는 정서적 위안을 즉각적으로 얻기 위해 선택한다. 무슨 말인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데 왜 자신을 해치는 행위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자해의 기능이란 걸 알게 되면 이해가 될 듯하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해, 그리고 자해하는 마음을 적고 있다. 자해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
자해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자해는 유행한다, 자해는 관심을 끌기 위한 시도다. 자해는 손목을 긋는다(리스트 컷). 주로 여성이 한다. 자해는 주로 청소년기의 문제로 크게 문제화할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해라는 신호를 너무 쉽게 본 듯하다.
자해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자해 연구자들은 최초의 자해자로 스파르타 왕이었던 클레오메네스 1세를 들고 있다. 헤로도토스<역사>에 따르면 아마도 정신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의학적인 최초보고는 1846년 독일 의사 에른스트 폰 베르크만의 논문에서 등장한 조울증 추정의 48세 여성이 마태복음의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버려라 라는 구절을 읽은 후, 자신의 눈을 빼버렸다 한다. 아무튼, 이런 자해를 현대의 연구자들은 자살 의도가 없는 자해라고 본다.
19세기 중반, 성별에 따라 자해 원인이 달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병역, 세금, 그밖에 의무이행을 피하고자 자해한 남성들의 사례가 보고됐다. 이 시기에 남성의 자해는 경제적, 실리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졌다. 한편, 여성은 히스테리아(이 용어는 자궁 문제에서 기인했다고)와의 관련으로 접근한다. 현대 이르러 남성도 히스테리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인정됐다.
자해는 ‘관종’?
자해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질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렇다면 어떤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 것일까, 관심을 끄는 것으로 그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해결방법인가, 지은이는 자해를 해봐야 관심을 두지 않으면 자해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식처럼 단순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의 관계나 관심이 필요하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고 한다.

자해의 기능
자해는 진통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자해로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듯, 자해라는 탈출구를 긍정하는 뉘앙스로 들릴 수 있어, 중립적인 언어선택이 ‘자해의 기능’이다.
즉, 자해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고, 또 확인한다는 것이다. 만약 괴로운 정서 상태나 신체 감각을 빨리 가라앉혀 주는 약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약을 찾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해가 바로 진통제로 작용한다. 득보다는 실이 많기는 하지만,
자해의 심리적 요인들
미국의 심리학자 왓슨의 유명한 실험이 있다. 그는 나에게 건강한 12명의 아이와 그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달라. 그러면, 그 아이 중 한 아이를 무작위로 골라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되도록 훈련할 수 있다. 의사, 법률가, 예술가, 실업가 등으로 말이다. 얼마나 무서운 사고 발상인가, 어린 앨버트 실험, 11개월 된 앨버트에게 흰 쥐를 보여주고 아이가 관심을 보이려고 하면 큰 소음을 내서 깜짝 놀라게 했다. 그 후, 앨버트는 잘 가지고 놀던 흰 쥐를 보기만 해도 울고 난리를 친다. 이렇게 인간의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보여주는 예였다.
자해를 새롭게 보기
자해를 경험했던 지은이는 심리학을 공부했고, 자해러를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임상 심리전문가가 됐다. 그는 우리 사회가 ‘자해’에 대한 이해도,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마치 벌레 보듯 피하려 한다. 얼마나 잔혹하고, 냉정하면 제 팔목을 그어버렸을까, 충동적이지 않나, 생각이란 걸 할까?, 이 모든 것들이 자해에 이르는 심리상태, 즉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동기와 과정을 필요 없다. 결과만이 중요한 사회에서 ‘자해’란 인생의 낙오자들이 하는 도피행위라고, 한치의 이해심도 배려도 아깝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여러분 주변에서 누군가 ‘자해’를 했다면 어떨까, 각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 당사자의 성격과 행동으로 봐서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혹은 응, 언젠가는 저지를 줄 알았지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얼마나 힘들었으면…. 오죽했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웠나 봐 따위의 해석도 나올 수 있다. 또 정반대로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거 아니야라는 반응, 자해에 대한 세상의 이해는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자해의 기능을 연구하는 연구자는 자해는 개인의 내적 기능과 개인 간 기능을 한다고, 전자는 자기 정서 조절에 미치는 영향을 후자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한다.

지은이는 자해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심리학적 실험과 이론을 끌어와 설명한다. 자해는 정말 죽고 싶어서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신호만이었을까? 이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다면, 자해한 이의 심신 상태는 어떠했는가를 먼저 살펴보라고 한다. 자해를 묵인하거나 방조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해라는 다소 이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에는 어쨌든 그 기능이 있다는 점을 새겨둬야 한다. 자해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게 아니라, 그런 행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누구(자녀, 형제, 친구 등)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