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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평점 :
낭만적 은둔의 역사
오늘날, 나 혼자, 나홀로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은 사라지고 없는 듯하다. 거리 곳곳마다, 포스트 빅 브러더(CCTV)의 감시 속에 사는 사람들, 김상규는<인간의 악에게 묻는다>(책이라는 신화, 2022) CCTV가 오히려 따뜻한 감시의 눈일지도 모르겠다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지만, 평가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라고….
인류라는 종은 무리를 지어 산다. 자유, 평등. 연대의 틀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아니 살아가야 하는 게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게 아닌가, 그 안에서 때로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할 때도 있다. 무리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자유로이 나 홀로의 시간을 말이다.
혼자냐 집단이냐는 논쟁
이 책에서 소개하는 요한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 이전의 연구자들은 혼자냐, 집단이냐 하는 논쟁으로 한쪽만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몽테뉴에게 은둔이란 공적인 생활에서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영국의 존 이블린은 자기 자신이나 일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야생 속에 은둔하거나 공적 임무를 져버리지 않고도 유용한 재밋거리를 찾을 그것이라고 하여, 세상에서 숨어버리는 극단적인 은둔을 반대했다. 그렇다면 ‘은둔’이란 뭘까?, 여전히 찬반론의 대립이 만만치 않다. 혼자 있는 시간은 공적인 삶의 보조제일 뿐 대체물이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 책은 18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날마다, 즉 혼자라는 매일의 일상에 관한 역사다. 지은이 데이비드 빈센트는 3세기 적어도 300년의 역사 속에서 ‘혼자’ ‘은둔’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7장에 걸쳐 이야기를 풀어낸다. 여는 장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을 생각한 사람들을, 1장은 고독, 나 그대와 거닐리 ‘산책’에 관하여, 2장 19세기 나 홀로 집에서 ‘여가활동’에 관하여 3장 기도, 수도원, 감옥에서의 ‘독방’을, 그리고 4장 20세기의 혼자의 오락 ‘취미’에 관하여를, 5장 영적인 회생 ‘회복’과 6장 어느 전염병의 귀환 ‘외로움’, 7장 디지털 시대의 고독 ‘당신’에 관하여를, 고독으로 시작하여 고독으로 마친다. 혼자된다는 것은 외부환경의 영향에 의하든 스스로의 선택이든 간에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서 혹은 그의 선택과 가치관, 사고법에 따라서 사뭇 그 느낌이 달라진다.
외로움은 통증?
각 장의 제목만 봐도 쉬이 어떤 느낌일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중 속의 고독, 즉 외로움은 전염병처럼 퍼진다. 이미 2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겪었던 ‘외로움’은 네이버 어학 사전에 이렇게 적혀있다.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 그런데 마취과 의사 마취과 의사 오광조는 "외로움은 통증"이라 정의한다(오광조<외로움은 통증이다>지상사, 2021). 외로움이란 단어는 문장과 문맥 속에서 전후 관계 속에서 읽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외로움"이 홀로 뛰어나와 독립된 단어로 다가온다. 지은이가 말하는 외로움은 아닌 듯 여겨진다. 외로움을 키워드로 하는 외로움론(論)=고독(孤?)인가, 꼭 그렇지만 않은 것 같다.
현대 사회의 병증이라고 유난 떨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가 놓인 환경이 많은 소통과 연결 속에 놓여있기에 가끔, 외로움이란 증상이 찾아올 때마다, 문득 세상이 낯설어지고, 생각해보니 늘 혼자였더라, 익숙한 세상이 갑자기 사라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통증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외로워도 괜찮아질 때, 비로서 나 혼자 외로운 세상을 건너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외로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명암과 같이 늘 붙어 다닌다. 즐거움 뒤에 찾아오는 외로움, 늘 틈만 보이면 고개 들 쳐들고 달려들고 들이미는 감정의 정체는 외로움이다.
망중한은 은둔의 지혜?
바쁘게 활동하는 가운데서도 잠시 한때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말이다. 짧은 시간 동안, 뇌리에 맴도는 생각거리에서 순간 이를 끊어내고 한가로움, 즉 변환 혹은 전환 스위치 작동이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기에 이렇게라도 해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결된 고독
지금, 이곳은 디지털 혁명 속에서 사회적 교류와 동시에 사회적 교류 단절을 추구하는 흐름의 극치를 이룬다. 지은이는 말한다. 혼자 있기의 역사를 알아보기 시작하면서 은둔은 물리적으로 고립되기, 연결된 채 혼자 있기, 딴 곳에 정신 팔기의 세 모습으로 실행됨을 알았다고, 19세기 이후 연결된 혼자와 정신 팔기의 양상은 두드러졌고 영국의 수도 런던은 팽창했지만, 인구의 5분의 4는 여전히 들판이 보이고 농지가 있는 시골에 살았지만, 계속되는 도시화와 확장된 교통망은 혼자 있는 풍경을 변화시켰다고…. 결과 개인이 당시의 통신 기술로 무장하는 것은 멀리 있는 친구, 친척, 동호인과 연결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북적대는 공간에서 계속되는 삶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자기 생각과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지금 세상은 모두 온라인에 접속하며, 스마트폰 없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거의 이상한 사람처럼 여기기도 한다. 18세기 말 고독이 주목받았던 이유 계몽주의가 너무 집단성만 강조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고독과 집단성 중 한쪽이 낫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둘의 관계를 이해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이를 생각하게 앞서, 현실은 어떠한가, 이미 디지털 미디어의 감시(거리마다 비추는 CCTV, 어떤 의미에서는 포스트 빅 브러더 시대)로 최후의 사적 독립 영역이 위기에 처했다. 다음으로 디지털 소통이 고독과 집단의 적절한 조화에 끼치는 영향력에 의심이 생겼다. 집착과 중독, 언어소통의 파괴 등을 걱정하기도 한다.
관점의 재구성
은둔의 위험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집단을 벗어나는 행위 자체를 병폐라고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대신 대인관계를 어려워하는 경향은 외로움이라는 범주에 들었다. 디지털 혁명 비평가들은 디지털화가 가져온 문제에 외로움도 포함했다. 과다 사용, 중독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데 곤란을 겪기 때문이라고…. 물론 노인층에서는 디지털화가 오히려 외로움과 고독의 적정선을 유지해줄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친지, 가족들과의 접촉할 수 있으므로 유용하다고,

위에서 보았듯이, 인류라는 종의 무리 습성과 혼자, 고독의 관계는 당대의 사회질서와 과학기술을 배경으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진행됐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즉답은 없다. 고독은 치머만이 말했듯이 자기 회복과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경향을 나타낼 수도 있고, 외로움은 자신을 직시할 기회와 시간일 수도 있다. 은둔은 때로는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은둔, 외로움, 고독은 각각 따로 떼어내어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다. 인류라는 종의 특성 속에서 이것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가….
결론은 없다. 여러분에게 혼자 있기는 여러 의미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외로움도 고독도 늘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있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