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와 노동의 미래 - 탈희소성 사회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아론 베나나브 지음, 윤종은 옮김 / 책세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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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희소성 사회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자동화담론은 영향력 있는 사회 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자동화를 이야기한다. 지은이 아론 베나나브(경제사학자)는 이런 자동화담론, 즉 현재의 과학기술을 분석하고 잠재력을 예측, 과학기술의 변화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데 그 전제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날로 발전하는 기계가 이미 노동자를 대체(노동력 대체), 둘째, 기계의 노동 대체현상은 완전한 자동화 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이며, 앞으로는 자동기계와 AI가 거의 모든 노동을 수행할 것이다. 셋째, 자동화는 인류를 고된 노동에서 해방하겠지만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노동해방의 꿈은 악몽으로 바뀔 수 있다. 넷째, 사유는 전혀 다르지만, 코로나팬데믹 이후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량 실업 사태를 막을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기본소득제를 도입, 노동의 양과 임금수준의 상관관계를 끊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려하나 

 

이 책은 6장으로 구성됐고, 1장에서는 자동화담론을, 그리고 2장에서는 전 세계 노동의 탈공업화 현상을, 생산성의 역설과 제조업 생산능력 과잉이 가져온 해악을 설명한다. 3장에서는 불황, 제조업을 대체할 만한 동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학기술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문제를, 4장에서는 노동수요가 낮아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노동인구는 과잉상태이며, 탈공업화 시대에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없어, 결국에는 조건을 따질 겨를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을 짚었다. 5장 절묘한 해결책이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 재무장이 과연 타당한 대안일 것인가, 그리고 6장에서는 탈희소성, 협력적 정의, 모두를 위한 자유 시간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를 싣고 있다. 대단히 도전적이다. 그저 4차 산업혁명으로 AI 시대가 도래하면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지만, AI 시대가 요구하는 일자리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인류 역사가 그렇게 발전해오지 않았던가 하는 발전론적 미래전망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전혀 양상이 다른 국면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즉, 불확실한 미래라는 것인데, 이 불확실에 대한 윤곽을 지은이는 시원하게 해설해주고 있다. 

 

 

우선 자동화는 단순히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한다는 점에서 노동력을 절약하는 다른 기술혁신과는 구별된다. 역사상 사회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공산주의의 위협이나 문명 파괴와 같은 사건이 사회에 엄청난 압력을 가할 때다. 전쟁과 재난은 큰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다르다는 점 또한 지적했다. 통계에 따르면 전쟁 후에는 부흥이, 재난 후에는 경기침체가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큰 사건 후의 변화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왜 달라지는가 하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자동화 담론에 대한 지은이의 반박

 

 

지은이는 만성적으로 노동수요가 낮아진 현상의 기원과 발달에 초점을 맞추어 지난 50년간의 세계 경제와 노동시장의 흐름을 바탕으로 자동화 담론의 전제가 되는 네 가지에 대해서 반박한다. 우선 지난 수십 년간 노동수요가 줄어든 것은 과학기술에 서 전례가 없는 혁신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생산효율이 기술 개선을 통해 꾸준히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노동수요가 낮아지는 저수요는 대량 실업이 아니라 지속적인 불완전고용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며, 셋째, 엘리트 계층은 노동자들이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을 방관하거나 내심 환영하기까지 할 것이므로 과학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기본소득과 같은 기술관료주의적 해결책이 저절로 도입되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봤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또는 완전에 가까운 생산 자동화가 실현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풍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을 통해 그런 세상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즉, 불평등의 심화하는 가운데 좋은 일자리를 사라지고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선에서 이뤄지는 노동력제공, 이런 사회구조의 변혁은 새로운 대중운동이 나타날 때, 개혁이 가능하다. 사회운동이 명확한 목표를 세워 전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더라도 실패할 경우, 그나마 기본소득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 자체로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발전된 과학기술을 수단으로 삼아 탈희소성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지다. 

 

 

탈희소성 사회

 

 

자동화담론의 핵심은 ‘탈희소성 사회’를 희망한다. 자동화로 인하여 인간의 최소 노동력을 투입해도 높은 생산력을 얻을 수 있어 상품의 양은 충분(때로는 과잉)하여 재화의 가격이 아주 낮아지거나 아예 공짜가 되는 경제 이론적 상황을 말한다. 이렇다고 해서 상품과 서비스의 희소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과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상당히 충족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과학기술발전을 통해 탈희소성 사회를 지향하지만, 이런 자동화담론(생산의 자동화 등)은 그 전제에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몇 가지 모호한 점들이 있다. 

 

 

협력적 정의 - 필요영역과 자유영역 확보를 위해- 

 

 

지은이가 설명하는 탈희소성 사회를 이루기 위한 협력적 정의의 핵심적 요소는 필요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 구분과 생산을 장악한다는 가정 아래 잠재력을 완전히 발현한 개인들이 노동저수요문제를 사회해방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를 논한다. 

 

필요의 영역에서는 공동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을 함께 부담한다. 이는 각자가 자유의 영역에서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필요노동의 범위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기에 합의가 필요하지만,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무엇이든 필요노동에 포함될 수 있다. 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20세기 사회주의 계산 논쟁에서 제기된 물음에 만족스러운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과 21세기의 도구를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자유의 영역을 위해서 개인이 맘껏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이를 탈노동이라고하나 이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탈희소성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지은이는 경제사학자답게 종횡무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자동화담론과 탈희소성의 문제를 신자유주의나 신케인스주의로는 풀 수 없음을 지적한다. 문제는 노동저수요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유토피아 소설에서 나오는 탈희소성의 세계는 꿈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즉, 인간이 노동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를 얻기 위해서 적절하고 적당한 시간 그 생산에 노력을 투여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 자유롭게 자신을 위해서 쓴다. 그런데 왜 이런 당연한 것들이 이뤄지지 않는가가 가장 큰 넌센스다. 왜 그렇지.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줄곧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 책은 자동화담론을 반박하면서도 이들의 문제 제기에는 긍정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 제기와 논쟁마저 없으면, 얼마나 더 비참한 상황으로 흘러갈 것이냐는 생각 때문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변화를 그리는 미래학자들의 여러 관측과 전망, 그 나름의 근거가 있어 그런 주장을 하겠지만, 거기에는 안타깝게도 인간의 모습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상화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왜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아져 가는데 사람들은 더 힘들고 가난해지는가, 뭔가, 이는 역설이 아닌가?, 

 

지은이는 사회운동을 하자고 한다. 아주 뿌리부터 뒤집어 엎어버리자고, 최근 노동조합운동이 힘을 잃고 휘청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튼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로는 더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만은 확실하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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