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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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지은이 장동훈은 가톨릭 사제다. 바티칸 우르바노대학에서 교의신학과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18세기 교황청의 동아시아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평범한 사제의 길을 보다는 교회의 대사회창구 사회사목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인천가톨릭대학에서 그리스도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지은이가 몇 년에 걸쳐 매체에 기고했던 그림에 관한 글들을 출판사는 명화 속 교회사 장면으로 엮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은이는 종교화가 아닌 세속화를 고집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적은 그의 변은 종교화, 세속화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구분의 엄격성과 그 기준은 그리스도교 문화가 유일한 문화이자 삶의 당연한 전제, 즉 신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를 둘러싼 공방들, 이합집산을 거처 독일에서 종교의 자유, 종교 관용이 성문화돼, 사실상 문화적 전제로서 그리스도교가 개인에 따른 선택이 됐음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는 보편성을 잃고 하나의 ‘특수’로 고립돼갔으며, 신의 시대의 종말과 인간 시대의 탄생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귀스타브 카유보트 <대패질하는 사람들>(1875년) 파리오르세 미술관 소장

 

지은이는 이런 변화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종교화와 세속화의 구분이 별 의미 없음을,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완전한 사회로 정의하면서 완전하지 않은 세상과 애써 구분 지으려 했다. 성 속이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가 그것이다. 1960년에 이르러 4년 가까이 진행됐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런 구도를 사실상 깨뜨리려 했다. 아니 깨뜨렸다. 하지만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튼, 세상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것이 교회 사명이라고 밝힌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언….

 

이 책은 4장으로 이뤄졌고, 1장 ‘나와 당신의 세상’ 2장 어둡고도 빛나는, 3장 종교 너머의 예수, 4장 혼미한 빛 순이다. 1장에서 다루는 작가 에드워드 호퍼, 자크 루이 다비드,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 리베라 등의 그림을 싣고 있다. 특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불안한 풍경’ 에 관한 지은이의 코멘트는 공감한다. 호퍼는 인간은 뿌리내릴 곳이 없이 부유할 뿐이다. 카페, 술집…. 모두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는 공간에 계류할 뿐…. 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의 그림은 현대 문명이 껍데기임을 말한다. 기술발전이 도시의 시스템과 외형을 바꿔놓았지만, 정작 사람들과 생생하게 결속된 게 아니라 박물관의 유물처럼,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된 벽난로처럼 현재의 삶과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그저 눈요기…. 인간은 풍요로워졌지만, 헛헛해졌고 안전한 도시는 만들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안락한 집’을 얻지 못했다고, (34쪽)

 

 

기계문명은 인류를 더 풍족하게 해주었지만, 호퍼의 지적대로 소외됐음을, 인간 시대가 열렸지만, 인간은 실상 호퍼의 군상처럼 고독하고 허무해졌다는 지은이는 지적은 참으로 날카롭다. 이는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한마음사, 2009), 데이비스 리스먼의‘고독한 군중’(동서문화사, 2016)이란 표현을 같은 맥락이다. 신자유주의 물결은 이들 삶을 더 힘들게 한다.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존재할 이유

 

 

갈릴레오 재판에 관해 가톨릭교회가 2000년에 잘못된 것임을 인류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이 재판에 대해 교회의 잘못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여기에 과르디니의 색다른 견해가 있어 살펴본다. 그는 재판의 부정적 측면을 지나치지는 않는다. 다만, 왜 갈릴레오에 대해서 완고한 태도를 고집했는가? 하는 이유다. 그는 창조의 중심에 땅이 있고 스스로를 그 동심원 한가운데의 존재라고 여겨왔던 세계관의 붕괴 이후 벌어질, 인간에게 찾아올 끝 없는 허무와 상실감을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윤판화들, 형님, 범놀이, 노동의 새벽 등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끝낼 수 없는 대화의 시작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 세계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단순히 관점의 변화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 가치가 뒤바뀐다. 인간 세계에서의 중심은 가치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오늘날 그 모습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세상의 희망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 대목을 바오로 6세는 명확히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상을 더욱 인간답게…. 라는 메시지의 배경이 아닐까?

 

펠리차의 네 번째 계급은 실로 오늘날의 현상을 마치 예견한 듯, 아니 당대의 산업화 물결 속에 변해가는 인간군상을 그대로 포착했다. 그림은 시대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프로파간다로서도 역할을 해낸다. 그림의 갖는 힘의 이중성이라 할 수 있겠다. 

 

 

종교가 정치로 해석될 때

 

 

종교적 처신이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되던 시대(16세기), 화가 홀바인은 종교화가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끝내는 초상화가라는 비종교적 비정치적 영역으로 도망쳤다. 그가 그렸던 종교화는 그를 독일 종교개혁 미술의 대표주자로 평가받도록 만들었다. 그의 사고는 어느 쪽이었을까, 홀바인이 그린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은 신을 가리킬 만한 그 어떤 장치도 없이 오로지 육신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교회의 모든 장식을 걷어낸 신교의 새로운 조형 언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처참한 죽음은 종교 너머에 있는 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오윤과 한국, 홍성담의 판화들,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가능성

 

 

한국 미술을 현실에 한없이 무기력하고 오래 신형식을 맹종하며, 실체 없는 순수주의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진단한 오윤과 그의 동료들, 김지하와 평론가 김윤수가 참여해 ‘현실동인’을 만들고 현실 동인 제1선언과 함께 준비한 전시회가 모교(서울대) 교수들의 고발과 당국의 제재로 무산된 사건, 이것이 민중미술의 기원으로 기억된다. 

 

형님, 범놀이, 춘무인 추무의 등, 노동의 새벽, 도깨비 등 오윤의 판화예술은 미래적 삶의 가공치를 향하면서도 거기에 못 미치는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비롯된 유홍준의 평, 하지만 작품에 관한 오윤의 해명은 없다. 

 

 

대중적이면서 대중적이지 않은 

 

근세, 근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가장 큰 작품의 의뢰인이었던 가톨릭교회를 잃어버린 프로테스탄트 지역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환경은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같은 장르화의 길을 열었고, 이 세속화의 한복판에선 이탈리아 바로크와는 다른 내면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빛과 어둠으로 짠 렘브란트와 같은 숭고화 중교화가 피어나기도 했다. 

교회가 선택한 바로크라는 조형 언어는 대중을 향한 것이기는 하나 표현 방식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책의 앞 뒤 표지

 

지은이는 그림을 통해서 교회사를 보기보다는 세속화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더욱더 인간답게라는 2차 바티칸 공회에서의 바오로 6세의 메시지가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끊임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성과 속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세속이 곧 교회사의 한 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 세계로의 이행 과정에 등장한 산업화 사회는 인간을 소외시켰고, 분자화 고립화를 초래했다. 노동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활동이다. 이 과정에서도 가치 생산은 왜곡되어, 노동의 소외를 만들어 냈다. 신자유화의 질서란 인간의 욕망을 끝없이 확대 재생산 발전해나가는 악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끝낼 수 없는 대화는 바로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을 다시 새겨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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