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논리학 하이데거 전집 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김재철.송현아 옮김 / 파라아카데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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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테거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 논리학>

 

하이데거는 왜 나치스에 협력했나? 그를 실존철학자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7년에 내놓은 책 <존재와 시간> 때문이다. 그는 1889년 9월 26일 바덴주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후설에게 현상학을 수학, 1923년 34살에 마르부르크대학 교수, 그리고 39살 때인 1928년 후설의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 교수, 1933년에 총장으로 그다음 해 당과 학내갈등으로 직에서 물러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스에 협력, 전후 추방됐다가, 복직, 1976년 세상을 떴다. 후반 인생 30년간 그는 고독 속에서 살았을까, 아니면 자신의 소신이라며 자위하고 살았을까?, 그가 죽음에 이르러 했던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이 대목에서 생뚱맞지만, 친일파 윤치호처럼 말이다.

 

이 책은 1934년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후, 여름학기 강의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논리학”…. 그런데 실은 이 시기의 정치적 행보와 2차 대전 때 나치스의 협력은 연속선 상에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게 그의 철학적인 신념이었을까?, 이를 연구자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행동은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지 않은가, 다른가, 언행일치는 동양적 사고인가? 이런 물음이 꼬리를 문다. 법학자들 가운데서도 나치스에 협력, 헌법을 손질한 이들은 생명의 위협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동서고금을 통해서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학자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요즘 TV에 나와서 썰을 풀어대는 만물 박사 텔레페서들처럼. 아무튼

 

왜 이 시기에 논리학 강의를 생각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1934년 여름학기에 “국가와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할 예정이었다. 이는 그의 저작을 편집했던 이들이 입수한 것들…. 1931년 10월부터 시작한 “검은 노트”에 암시니 숙고니 지침들이니 하는 것들에서 논리학을 강의하려는 이유를 발견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실제적인 논리학 아래에서 구상하는 것은 진술이 아니라 자기 자신 위에 스스로 세우며 존재에서 존재자를 표현하는 것은 진리의 본질에서 일어나는 근본 사건이라고(283쪽-편집자의 후기)

그의 현존재가 존재자 전체 그리고 그것의 깊이와 근거에서 존재자 전체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는 자는 어떤 논리학도 필요 없다. 논리학은 그에게 무가치한 것이다.

 

언어란 무엇인가, 앎이란 또 무엇인가, 그리고 말함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논리학의 근본 현상은 진술이다. 논리학이란 제목은 그리스어 로기케의 약어다. 이 표현은 로고스와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보충되어야 하는 것은 에피스테메 즉 앎이다. 따라서 논리학은 로고스와 관계하는 앎이며, 로고스에 정통해 있음을 의미한다. 로고스는 이야기, 말함이다. 논리학은 진술의 근본구조와 근본규칙의 형식에 관한 학문이다.

논리학은 사고를 다룬다. 사고가 일종의 말 함이라면 그때 사고에 대한 앎, 말함에 대한 앎, 언어에 대한 앎, 모든 논리학의 근본 물음,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며, 언어철학은 논리학의 전당이 된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크게 2부 각 3장(33절)으로 구분되는데, 1부는 모든 논리학의 근거 물음이자 주도적인 물음으로서 언어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1장에서 언어의 본질, 2장에서 인간의 본질, 그리고 3장에서 역사의 본질을 각각 묻는다. 즉, 언어와 인간과 역사의 본질을 묻는다. 그리고 2부에서 역사의 본질로서 근원적으로 통일된 시간이라 제목으로 인간의 역사성은 변화된 시간과의 관계에서 경험된다. 즉 규정과 임무와 사명으로서 규정, 노동으로서 규정, 그다음 장에서 인간을 그에 관한 규정에서 경험함, 기분, 노동, 사명, 임무의 내적 관계를 살핀다. 3장에서 인간존재와 언어를….

 

강의에서 그는 논리학 자체를 시원에서부터 근본적으로 해체하여 그 이름에 담긴 것보다 더 근원적인 과제를 일깨우고 포착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한다(25쪽). 그것을 위해 그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파악을 한다. 이는 항상 그가 그 시대 속에서 여전히 생각했던 “민족”의 현실적인 “변혁”과 연결된다(125쪽). 그는 결론에서 “근원적인 언어”는 “시 짓기의 언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63쪽).

 

인간존재와 언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답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언어는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따라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그가 누구이냐는 물음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인간 현존재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했고, 인간의 존재를 시간성, 염려, 규정에 대한 염려로 파악했다.

우리는 여전히 언어를 인간 현존재의 구성 틀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언어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정말로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지금 언어는 인간 현존재라는 개념에서 의문시되고, 진정으로 근거가 제시된 의미에서 비로소 물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지금 현존재의 본질적 구성 틀에서 획득한 통찰력과 거기에서 생겨난 개념의 도움으로 언어의 본질을 정의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값싼 속임수다.

 

민족이라는 역사적 현존재의 중심을 지배하는 언어

 

언어는 격리된 주체 속에서 출현하고, 주체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으로서 이리저리 건네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주체적인 것도 객체적인 것도 아니다. 언어는 개별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언어는 그때마다 역사적인 것으로서 존재를 위임받고, 존재자 전체에 내어 놓여 잇는 사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언어의 사건 속에서만 존재를 획득하고 상실한다. 언어는 세계의 지배를 형성하며 보존하는 민족이라는 역사적 현존재의 중심이다. 시간성이 시간화되는 곳에서만 언어가 사건으로 일어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논리학은 결코 논리학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논리학의 물음은 세계의 지배가 언어에서 사건으로 일어남으로써 존재의 힘을 갖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앎의 염려로서 생겨난다.

 

이렇게 알듯 말듯, 언어는 사고의 외부로 표출이며, 사고는 논리학을 통해서 앎이 되고, 그렇지만 논리학은 하룻밤 사이에 완성하여 교본으로 시장에 내어놓을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가 논리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언어”의 위력 때문이 아닐는지, 나치스에 동조했다, 안 했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니 논외다. 언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사고를 반영하는데 이 밑바탕에 흐르는 것들을 정리하고 다듬을 것인가, 촌철살인, 세 치의 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 이유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이데거가 국가와 학문이라는 걸 하려면 적어도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 표현적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걸 먼저 배워야 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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