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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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작가 이문열의 자화상인가?

시인(詩人,時人)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사람인지, 시대의 인물인지, 아니 이 둘 다인지,

 

이 소설이 나온 지는 한 참됐다. [31] 에 실린 "시인과 도둑"을 단편소설선에서 읽었는지 어쨌는지 출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은 또렷이 지금도 기억한다. 이 장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언제나 보편적이다. 시대를 관통해서 통하는 진리라고 생각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느낌이 그러하다.

 

선생의 독보적인 문체는 다작임에도 늘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 내공이 깊은 걸까, 아니면 선생이 이야기하듯, 이야기꾼인가, 선생은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우리나라의 썰 꾼 중 윗길에 가는 이다.

 

전설따라 삼천리...

 

<시인>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오래전에 라디오에서 김삿갓을 소재로 한 방송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할아버지 선천부사 김익순은 서북지방에서 일어났던 홍경래 난(이를 농민혁명이라 해야 하나, 이는 제쳐 두고) 때, 홍경래 군에게 항복했고, 그에 빌붙어 부역했고, 반군이 밀리자, 그의 군사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했다 한다. 설화에 따르면, 어린 김병연은 이런 사실을 몰랐고, 그의 나이 스물이 되는 해(순조 26, 1826), 강원도 어느 고을 백일장에 나서는데, 이때 시제가 가산 군수 정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우러러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름을 굽어 한탄하라고 했다.

 

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을 천하에 둘도 없는 역적으로 징치해야 한다는 논설을 했고, 장원이 됐다 한다. 이때 만난 관서 사람 노진은 그의 시를 격찬한다…." 그렇지만. 김익순에게 자손이 있다면 그들에게 그 시는 무엇이겠습니까?, 당대 양반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노진의 말, 수신은 치국의 바탕, 수신의 효를 거치지 않고 치국의 충에 이르는 길은 없고, 그게 대성(공자)의 가르침이셨소. 두 사람 간의 수작. 김병연의 일탈 시작이 된 것인가, 아무튼 설화는 이를 계기로 일생에 걸친 떠돎의 시작이라고 한다.

 

작가는 병연의 시를 세 시기로 나눠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형 병하와 함께 인적 드문 골에 들어 장가들고 농사일하면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던 병연은 어머니 함평 이씨의 평생소원은 과거급제하여 집안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에 못 이겨, 과거를 보러 길을 나섰으나, 당시 과거는 형식이요. 이미 권문세도가의 입신을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과거는 실력이 아님을 알게 된 병연은 생각으로 권세가의 객으로, 당대의 지배층 자제들과 어울려 뭔가를 도모하려 했다. 뜬구름 잡는 "시"를 생산하다가, 결국, 형 병하의 죽음을 알게 되어 낙향한다.

 

아니, 이때 당대의 실세,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말, 대역죄인으로 연좌시만을 면한 것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라는 말에, 현실을 깨닫게 된 병연은 방랑길에 나서는데, 이때는 시인으로서 날개를 펴지 못한 그저 시를 끄적이던 수준이었다. 두 번째 시기는 취옹과의 만남이겠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층계급 양반의 사고로 "시"를 감히 논하는가, 이때부터 서민들과 함께, 그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삶, 그리고 시의 파격을 가

져오는 취옹과의 수작을 보자.

 

"원래 큰 시를 오늘날 보는 것처럼 작게 줄인 것은 요순과 공맹을 이은 썩은 선비들이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 혹은 인(仁)으로 가두고, 혹은 예로 얽어매고, 의로 옭죄고, 훅은 지로 억누르니 뒤에 온 사람이 어찌 시가 가졌던 원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작은 것을 키워 못쓰게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줄여 놓아서 못쓰게 된 걸 이제 원래대로 키워 쓰려는 것뿐이다"(152쪽)

이런 취옹의 말, 다복동(홍경래 반군의 본영)을 찾는 병연, 여기서 할아버지 김익순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의기 있는 이였고, 군사 등이 나쁜 놈들이라 그들의 목을 벤 것이라고…. 김삿갓 병연의 붓끝은 이제 민중 속으로 거침없이….

언문진서 섞어作(한글과 한자 섞어서 시를 짓지만)하니

   是야非야皆吾子(옳으니 그르니 하면 모두 내 아들놈)이라 (190쪽)

 

시의 파격만이 아니라 기성 사회와 정통에 대한 도전의 뜻까지 보인다고 작가는 쓰고 있다. 병연은 관서 지방을 떠 돈 지 몇 해, 우연히 산골 마을에서 늙은 선비를 만나고, 그로부터 홍경래 반군의 이야기를 듣는다. 왕이 되려 했던 자다. 지금을 왕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오르려 했다.'라는 것이다. 중앙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여기에 힘을 보태고, 나섰던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알아버린 할아버지의 진실, 사건의 본질이 그러하다면 그의 울분과 한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고, 그걸 바탕 삼았던 그의 정서와 예술적 감수성도 다복동을 찾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206쪽)

 

이제야 그는 시인으로서 길에 접어든다. 취옹이 말하듯, 인의예지의 허울에서 벗어나, 자연을 노래하는 그런 시인으로 서른아홉 나던 해 봄에 찾아온다. 관서 사람 노진으로부터 그에게 온 서신(병연이 할아버지는 성토했던 그 시를 적어), 또 한 번 정신을 차린다.

 

시인과 도둑

 

병연은 양비(?非)와 양시(?是)의 세월을 보냈다. 때로는 우주와 인생을 다 이해한 것처럼 그 두 상반된 세계와 인식을 한꺼번에 꾸짖었고, 때로는 그 둘을 아울러 껴안고 아파하며 뒹굴었다. 양비일 때는 어김없이 양쪽 모두가 적이 되면서도 양시일때는 모두가 벗이 돼주지 않았다.

시인은 산길을 가다 도둑들에게 잡혔다. 두목인 제세 선생이라는 먹물이다. 너를 살려둬야 할 이유를 말하라 한다. 시인은 산채 사람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생산할 수 있고, 더 큰 도둑들에게 자발적인 회개, 위로부터 스스로 고쳐 나갈 의지를 기르게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생산하여 선생의 적들에게 나눠 준다면 힘들고 험한 싸움 없이도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소라고….

 

이렇게 해서 도둑 산채에 남게 된 시인, 그에게는 시의 용도를 시험해 볼 기회이기도 하였다. 시에 노랫가락을 붙여 노래를 만들고 이를 퍼트리고, 하지만, 상황이란 늘 살아있어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산채의 도둑들은 생각하게 되고, 합리성을 논한다. 아래의 큰 도둑들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게 된다. 겨울이 지나고 산에서 아래로 출병, 이미 약해 빠진 도둑들로는 거사할 수 없었다.

 

제세 선생이 시인에게 말한다.

"혁명을 꿈꾸는 자들에 대한 경고다. 무릇 혁명하려는 자는 실질 없는 혁명의 노래가 거리에서 너무 크게 불리는 걸 경계하여라. 온 숲이 다 일어나야 날이 새는 것이다. 일찍 깬 새 몇 마리가 지저권다 해서 날이 새는 것이 아니다."(240),

오히려 일찍 깬 그들의 소란은 숲의 새벽잠을 더 길고 깊게 할 수도 있다. 선잠에서 깨났다가 다시 잠들게 되면 정말 날이 새도 깨나지 못한 법"

"어서 떠나거라. 이번 실패의 연유를 그대에게 전가할 유혹이 일기 전에“

시인은 다시 길을 간다. 세상 시비의 먼저를 툭툭 털며, 구름처럼 바람처럼 들꽃처럼 산새처럼….

 

작가 이문열은 <시인>이기도 하고 <제세 선생>이기도 했다.

 

이 [31] 장 시인과 도둑, 이 장 안에 담긴 시인의 생각과 제세 선생의 생각이 곧 이문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서울대 국문과를 들어갔다가 그만두고, 사법시험에 3번이나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그의 아버지는 월북자다. 어찌 보면 병연과 같은 처지다. 초년에는 재능에 의탁하여 입신출세를 꿈꿨다. 시인이라는 소설 자체가 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작품 활동의 내용과 경로를 보더라도. 조금은 억측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90년대 어느 날, 동아일보의 글을 실어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향해 "홍위병"이라 했고, 젊은이들에게 철없는 짓을 그만두라 했다. 아마도 이 소설 속 시인처럼 용기와 믿음이 생기게 하고,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프로다간다(선전선동)을 해 본 게 아닐까 싶다. 혹은 제세 선생 말처럼 치기 어린 행동은 결국 큰 혁명의 흐름을 어리석게도 끊는 짓이 될지 모른다는 염려, 우려에서 나온 말일지도…. 그 시기에 오적의 김지하가 젊은이들에게 일갈했다. 미친 짓을 그만두라고. 왜 그들의 눈에는 젊은이들의 이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외침이 불안하게 비쳤을까,

 

시인은 참으로 깊이가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 속에서 다시 옆길로 빠지셔한다. 독창적인 소설 쓰기, 문장이나 가져온 어구들 단어들, 지금도 감탄한다. 하지만, 이후로 시인이 황석영의 장길산처럼 장편소설이 되지 못하고 그만 묻힌다. 왜 그랬을까? 시인의 세 시기만 보더라도 충분할 텐데, 아쉽다. 그러나, 이문열 선생에게는 절제의 힘이 있다. 대중에 영합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라는 소설은 그의 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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