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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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 책, <<어둠의 속도>>의 에필로그, 저 밖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앞선다. 주인공 루 애런데일는 어둠의 속도가 빛보다 빠른 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기뻐한다. 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 소설의 피날레는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말이다. 이 책의 꼬리에 예전에 읽었던 “장애학의 도전”(김도현,오월의봄,2019)의 한 대목,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이 소설의 지은이는 다소 특이한 경험과 경력을 지녔다. 역사학을 공부하다가 해병대 기술병으로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생물학을 전공, 직업으로 응급의료원, 교사,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한편, SF소설가로 작품을 쓰고, 이 책으로 2004년 네뷸러상을 받았다. 그는 소수자(장애인, 성소수자)의 권리보호와 신장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실천가이도 하다. 이 소설은 자폐아를 입양 20여 년간 함께 살면서 어머니로서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랑이 주인공 루의 세밀한 감정묘사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현실 세계의 차별과 장벽을 SF세계에서는 이를 극복한 자유로운 세계,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옮긴이의 말 중에 책의 제목이자 전체를 관통하는 <어둠의 속도>는 지은이와 그의 아들 마이클의 사이의 대화에서 온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이 들어와 문틀에 기대 물었어요.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킬로미터라면, 어둠의 속도는 얼마예요?"

제가 일상적인 답을 했죠.

"어둠에는 속도가 없단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더군요.

"더 빠를 수도 있잖아요. 먼저 존재했으니까요." (505쪽)

 

 

이 책은 2007년 국내에서 출간, 절판, 푸른숲에서 다시 다듬어 낸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임신 중의 자폐 진단과 치료가 가능해진 근미래. 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은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주인공 루 애런데일은 자폐인으로, 대기업의 특수 부서에서 근무한다. 'A 분과'라고 불리는 특수 부서에서는 자폐인의 특별한 패턴 분석 능력을 살려 제품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A 분과'의 특성상 부서의 직원들에게는 독립된 사무실과 주방 시설, 운동 기구와 음향 장치 등이 제공된다. 이에 들어가는 비용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루의 상관 크렌쇼는, 새로운 자폐증 치료 실험에 대한 소식을 듣고 'A 분과'에 압력을 넣기 시작한다. 그의 목적은 그들의 능력은 고스란히 살린 채 그들을 정상인으로 만들면 특수 복지혜택은 필요가 없게 되고, 회사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고 한다. ‘정상화 수술’의 실험대상으로삼으려고 하고, 루와 동료들은 유일한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자폐가 사라지더라도 과연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루는 자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김초엽 작가는 이 소설을 추천하면서 비정상은 정상으로 교정되어야만 하는 상태일까? 기술의 발전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구원할까? 장애는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정체성일까? 라고 묻는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어떻게 우리는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둠에는 속도가 없어. 어둠이란 빛이 없는 공간일 뿐이야.” 에릭이 말한다.

“만약 누가 중력이 1 이상인 세상에서 피자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린다가 묻는다.

“몰라.” 데일이 걱정스런 말투로 대답한다.

“무지(無知)의 속도야.” 린다가 말한다.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이해한다. “무지는 지(知)보다 빨리 확산하지.” 린다가 씩 웃고 고개를 꾸벅인다.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22쪽)

“자폐증을 역진(逆進)시키는 방법에 대해 누가 연구하고 있대. 쥐인지 뭔지에 실험했을 땐 성공했어. 이제 영장류에 실험한다더라. 틀림없이, 곧 너희들도 나처럼 정상이 될 거야.” 조 리는 늘 그가 우리 중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한 번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음이 이 말로 분명해졌다. 우리는 ‘너희’이고 정상은 ‘나처럼’이다. (23쪽)

나는 나 자신이기를 좋아합니다. 자폐증은 나 자신의 한 부분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내 말이 사실이기를, 내가 내 진단명 이상이기를 바란다.

“그러니―우리가 자폐증을 없애도 당신은 같은 사람일 겁니다. 그저 자폐인이 아닐 뿐이죠.”(394쪽)

 

소설 속 연구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폐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자폐가 사라져도 정체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임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가장 극적인 공포의 순간은 연구자의 말에 동조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소설의 설정은 간단하다. 자폐인이 수술로 정상인, 아니 비자폐인이 된다. 그렇다면, 자폐인의 특성은 정체성이 될 수 없나, 자폐인과 비자폐인의 구별이 왜 필요한가? 장애라는 말은 200년 적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장애인차별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장애, 비정상, 결핍은 우생학적 논의를 통해서 차별을 강조했다(한때, 아예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그래서 이들 열등한 존재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엄연히 통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우생학을 파는 시장과 세련된 이들의 논리가 통용된다. 우생주의적 욕망이 현대를 살아가는 자기-경영적 주체들에게 내면화될 때, 신자유주의적 권력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유전학적 서비스와 생명공학 상품을 통해 우생주의적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된다. 굳이 강압적 정책을 펴지 않더라도 말이다(장애학의 도전,152쪽), 즉, 장애를 미리 발견, 예방 혹은 이의 실패 시 원천적인 배제, 제거나 장애 증상의 완화, 악화방지 현상유지 등을 위한 약품 등을 모두 포함한다.

 

장애인은 "차별받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손상은 손상일뿐이나,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 이때 특정한 관계란 다름 아닌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이며,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인중심사고에 따른 행동의 사회적 결과이기도 하다. (선량한 차별??-본의 아니게 그럴 수도 있다. 모르는 게 죄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여기서는 별론으로 한다. 하지만 선량한 차별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선량과 차별은 품고 있는 뜻이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자폐는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비장애인 중심적 사고는 당연히 비장애인은 정상, 장애인은 비정상, 결핍과 완전, 완성의 구도로 보게 된다. 이 사회는 비장애인중심시스템이다. 장애인은 아예 그 존재 부정이 전제돼 있다. 얼마나 무서운 차별인가,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장애인의 관점이 아닌, 시좌를 통해서 문제를 발견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뭔가를 만들거나 구축해야한다는 것이다. "비장애인중심사고"에서 "차별없는 사고"로 전환(패러다임의)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기결정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동물과 장애인에 대한 접근(피터 싱어, '동물해방', 연암서가 2012)과, 수나우라 테일러의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을 잇는 사유(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 오월의 봄, 2020) 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분배와 인정)에서 장애와 인권적 시각 등에 대한 공부 또한 필요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루는 자폐(발달장애)이지만, 지적,지체장애 등 모든 장애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 사고가 달라져야 함을 제기하고 있다. 자폐, 비자폐의 구분이 왜 중요해,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데...

 

<출판사에서 도서를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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