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대법원 제2부 2021다227100 손해배상(국)>
이 책의 독특함, 노동학 선언을 보자
내가 이 책을 주목한 것은 바로 "노동학"이라는 표현 때문이고, 학자가 아닌 현장 실천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지금은 노동권익센터에서 노사정을 아우르는 균형과 중심을 잡으면서 공공의 선을 지향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학제 간의 협업은 과거부터 있었고, 90년 중반부터는 학제 간의 영역을 넘어서 융합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서는 현실 세계를 파악하고 연구하는 데 한계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법과 사회학, 법과 경제학, 감정노동을 키워드로 한 감정 사회학, 노동을 주제로 한 노동사회학 등이 말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노동학을 살펴보자
노동법률을 주축으로 여기에 수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공학, 의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과 연결되기에 이를 한데 묶어 실사구시학으로서의 노동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입론이다. 한 번 살펴보자. 노동법은 민법의 특별법이다.(노동력 거래, 즉 계약관계를 다루고 있어서다, 또한 노조법 및 근로기준법 위반은 노동 형법의 영역과 민법 계약영역이 함께 존재한다. 산업재해보험 보상법(이하 산재법) 역시 민법의 손해배상이나 채무불이행을 근거로 하며, 산재 등급 결정 시에는 의학(주로 직업환경의학 혹은 직업재활 의학 등), 노동경제학, 노동사회학, 노무관리론, 노사관계론 등이 모두 관련성을 맺고 있어서다. 이렇듯 필요에 따라 계속 만들어진 법들과 노동시장을 포함한 노동 세계를 아우르는 법과 제도, 이들 뒷받침하는 학제들을 융합하는 "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사실 노동이란 단어는 꽤 어렵다. 한자로는 힘쓸로(勞) 움직일 동(動)으로 움직이고 힘을 쓰는 정도를 의미한다. 이를 Work로 부르던 Labor로 부르든 간에 각각 표상한 내용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일, 활동을, 후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노동이다. 요즘에는 일(Work)라는 표현을 노동과 구분하여 일부러 쓰기도 한다(이에 대한 현상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년의 저작)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됐다고 한다. 도대체 소외됐다는 의미는 뭔가 그렇다면 "노동"이란 무엇인가 백과사전(네이버)의 정의를 보자 노동은 "자연 상태의 물질을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라고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란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자연 상태의 물질 등에 뭔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고 그 가치는 노동의 결과이지만, 이의 소유권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로 옮아가는 것으로 노동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난이요. 하루빨리 이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을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논지다. 꽤 어려운 이야기다.
또,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신의 행위로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자본론> 1(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 225~226쪽], 이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 역시 자본가에게로 넘어가기에 착취라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노동"이란 단어 그 개념 역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져야 하는데, 그 달라짐(변화)의 주체가 바로 사회구성원, 즉, 노동자와 사용자, 정부 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가 지향하는 노동학은 딱딱한 법률, 어려운 수학과 통계, 경제, 노무관리 헷갈리기만 한 모든 모호한 것들을 한데 모아서 노동이란 키워드로 묶어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노동"은 블루칼라(푸른 작업복을 입기에)의 상징이 아니다. 화이트칼라(흰 와이셔츠를 입기에)가 하는 것은 노동인가, 아닌가, 노동자란 말은 여전히 레드 퍼지(공산당, 좌파 추방)이데올로기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모호한 근로자란 말을 쓴다. 이 책 또한 노동자란 말이 주는 이미지들 때문에 법률용어인 근로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가치중립적인지 아닌지는 별론으로 하고, 다양한 계층을 염두에 두고 편하게 쓴 글이라 여겨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