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조직론으로 본 한국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와 그 해법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박권일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서야 대학생활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경제경영학'을 외면했던 내 마음가짐이다. 오붓하고 단란하게 두런두런 강의를 나누던 철학수업에 비해, 빠글빠글 미어터지는 경영학 수업은 비용대비 효율적인 측면에서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문과쟁이라 숫자놀음에는 '감동'이 없다고 쉽게 단정지었다. 약삭빠르게 처세를 익히기 보다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탐구하겠다는 철없던 시절의 객기덕분이다.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잡다한 분야를 닥치는대로 들쑤시긴 했지만, '경제경영'과 '과학기술'은 영 범접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나마 내가 떠드는 소박한 지식들은 다 '우석훈'님과 '강양구'님으로부터 가능했고, 인식의 지평을 단단하게 넓혀주었다.

 '대안경제학시리즈 2권'이라고 밝힌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는 이전의 '88만원 세대'에서보다 구체적인 사례들로 위기를 진단하고 설득력있는 해법을 제시한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라고 막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어떤 맥락과 이유로 '문제'를 유발하는지, 그 영향력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에 대한 전망이 '조직론'의 틀안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외면했던 경영학과목 '조직론'에서 말이다. 효율성이라는 좌표가 조직논리와 내부경재으로 양분된 지표위에서 협동진화로 수렴하기 위한, '주식회사 모델' 역시, '주식'이라는 말에 '투자열풍'만을 떠올리는 내 척박한 인식에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명제가 기업의 '영속성'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성과'로 촉발되는 내부경쟁이 조직의 '협동진화'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두가지 발제를 염두하고 이 책을 살핀다면, 아마 지금 당장 바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릴 것이다. 실제 중국과 일본이라는 외부적인 요소에 경제침체의 원인이 있다라면, 변화를 추동할 운신의 폭은 넓지 않다. 변화의 가능성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성공지침서'의 제1계명이 아니던가.

 예술적 감수성으로 무장하고 경제학을 도구삼아 거침없이 썰을 푸는 우석훈님 블로그와의 인연은 바야흐로 4년째에 접어들었다. 그의 블로그에는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자동기술되어 감정의 편린이 노골적이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명쾌하지만 수려하지 않고, 그의 입장은 분명하지만 이념적이지 않다. 그가 오랫동안 블로깅해주기를 기대하며 부지런히 그의 글을 리뷰하러 한다.

 

 - 밑줄긋기 -

 사실 주식회사는 그 형태나 운영방식 자체가 다른 형태의 회사에 비해서 상당히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다른 어떤 형태의 경제조직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개절차 및 사회적 감시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식회사는 1인 소유주가 존재하지 않고, 일종의 회의체-이것을 이사회라고 부른다-에 의해서 운용되고, 중요한 결정은 소유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총회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다. 주인이 무한의 책임과 동시에 전권을 갖는 무한책임회사와의 다른 방식으로 운용되는 주식회사는 그 자체로 상당히 민주주의적인 운용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역사만을 따지면 프랑스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94 )

 앞으로 수 년 동안 지방에서 진행될 토목공사에 풀려나가서 수도권의 아파트 투기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돈만 간단히 계산해도 수십조 원 규모는 넘고, 적당한 일자리만 있다면 일하겠다고 하는 대졸 이상의 예비 실업자가 수백만 명이다. 지금 한국경제의 틀에서 부족한 것은 노동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결합해서 '생산'이라는 아주 위험한 도약을 수행하는 바로 그 조직이다. 지금은 세계은행에서 자관을 받아 JP가 국내 업체들에게 차관 나누어주던 시절 같은 '차관경제'의 시절도 아니고, 외국에 유학 간 한국 학생들을 카이스트에 어렵게 유치하면서 과학기술의 기반을 만들어가던 시대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오히려 기업의 또 다른 속성인 조직에 대한 기술과 관리에 관한 기법들이라고 할 수 있다.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 조직은 아직 노동자들과 대화하고 노조에게서 협조를 끌어내는 방법을 잘 모른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교육되고 훈련된 한국의 여성드로가 일하는 법도 아직은 잘 모른다. 그리고 20대와 일하는 법을 모르고, 고령노동자들의 지식을 활용하는 법을 잘 모른다. 술 마시지 않고 조직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법을 잘 모르고, 접대를 하거나 봉투를 건네지 않고도 정부 기관과 협의하고 협조를 이끌어내는 법을 잘 모른다. 조직 내부에 다양한 방식으로 생겨난 비공식 조직들을 제어한느 법을 잘 모르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한국의 생산부문에 제조업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위기가 증폭되어 이제는 사회적 위기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가 국민경제 모델을 채택한 이후로 기업의 위기가 곧 생산의 위기고, 이러한 위기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위기가 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이다. 1차적인 위기 요소를 내부에서 찾지 않고, 결국 외자유치가 최고의 방법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좀 황당하고, 그야말로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도 잉여자본이 넘쳐나고, 투기적 용처를 찾아다니는 돈들이 길을 잃고 부동산과 코스닥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결국 일본 부동산을 비롯해서 해외로 나가는 이 마다엥 외자 유치가 안 되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얘기는 정말 이상하다.

 산업자본에 위기가 온 것은 국민경제 모델의 역사적 흐름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에서 문제가 생겼고, 그래서 이런 것들이 돌고 돌아서 더 큰 위기로 증폭되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훨신 더 논리적이며 일관된 설명이다. ( p. 146 -147 )

 

 한국과 일본의 조직들은 다양성이라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인데, 이들과 경쟁 중인 미국 기업들은 이들과는 반대로 전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이 높은 집단이다. 유색인종은 물론이고, '핸드캡드handicapped'라고 표현되는 소수 민족들의 조직 내 구성도가 상당히 높고, 당연히 여성진출도 활발한 편이다. 1990년대에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초집단이었던 미국 해군이 소수민족과 여성들에게 보다 조직의 문을 크게 열었고, 이렇듯 경제적 약자들이 조직 내에서 가지고 있는 핸드캡을 극복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층부가지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누에 보이지 않는 조직 내 배려가 생각보다 강려갛게 작동하는 것이 최근 흐름이다. 유럽 기업들의 경우도 이민자들과 여성의 기업 참여는 당연히 우리나라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기업들은 상당히 높은 균질도와 '비非성과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피아 모델에 가까운 빨간펜형 구조가 오히려 강화되는 편이다. 아직 골프를 즐길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는 여성직원들도 입사 초기에 골프부터 배우고 폭탄주도 배워야 하는 상황은 '퇴행'이라고 부르는 역방향의 진화에 해당한다. 물론 이러한 주류 집단의 힝위 모델에 대한 의태가 개인 전략으로서는 중요할 수 있지만, 조직 자체로 본다면 다양성을 현저하게 약화시켜 오히려 40-50대 빨간펜들의 '역할 모델'이 강화되는 흐름을 만들게 된다.

 소위 '조직의 마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성, 지방대 출신, 그리고 저학력 숙련노동자들을 어떻게 제품개발을 비롯한 다양한 경영활동에 참가시키고 조직의 다양성을 높일 것인가는 포스트 포디즘 시대의 한국 조직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현 상황에서 그냥 내버려두면 조직은 당연히 40대 빨간펜들에게 더 편한 방식으로 진화가 강화될 수 밖에 없다. 구 동구권의 조직들에게서 발생했던 내부 조직의 문제가 자본주의라고 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조직은 자연 발생적인 내부의 힘에 의해서 제어되지 않고 방치되면 언젠가는 관료화의 경직성과 내부 마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이 발생하게 된다. ( p.189 - 190 ) 

 

 한국에서는 유럽보다 20년 정도 늦게 한국형 포디즘이 작동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심리상담소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들의 빈 자리를 채웠던 것이 교회와 점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주요 종교기관인 기독교와 가톨릭 그리고 불교의 전통적 경쟁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1990년대에 급격히 강화되기 시작한 '대형 교회 현상'은 왜 한국 사회에서 1960~70년대의 자본주의형 계몽시대에는 곧 사라질 것 같아 보였던 점집이 1990년대 이후에 오히려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는가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포디즘의 강황에 의해서 생겨난 개인들의 비정상 상태에 대해서 대형 교회와 심리상담소 그리고 점집은 대체적 재화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심리적 안정과 대화'라는 특수 서비스와 관련시켜 볼 때 심리상담소가 네오 케인지언 전통이 강했던 유럽 사회가 제시할 수 있었던 공공적 해법이었다면, 한국의 대형 교회는 공적 장치 없이 포디즘을 강화시킨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대형 교회가 포디즘의 방식으로 볼 때 집단적인 심리상담소라고 한다면, 점집은 포스트 포디즘에 적합한 명품 브랜드 방식에 의해서 운용되는, 그야말로 '하이엔드 마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별화된 고품격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집은 대형 교회에 비하면 맞춤형 고급 서비스인 셈이다. 대통령에 출마하고자 하는 대선 후보들에서부터 새로운 투자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대기업의 총수들, 그리고 그야말로 별 몇 개를 달고 있는 군대의 장군들가지 자신들의 심리적 위안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서 찾는 곳은 많은 경우 점집이다. ( p. 221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