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지향 -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순분 옮김 / 열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뜨끔하다. '니트족'이든지 '88만원세대'든지 허술한 나를 조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금새 날을 새우고 맞짱뜰 태세를 한다. '하류지향'의 선정적인 부제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적 책읽기를 자극했다. 만, 내용은 120% 공감하는 바이다.

 '왜 배워야 하죠?'라는 질문에 담긴 '등가교환'의 거래관계, 소비주체로 사회에 진입하는 현세대는 '자기찾기 이데올로기(!)'를 강요받고 자기결정.자기책임론으로 완성된다.

 요는 이런말이다. 학생들은 '교육'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취급하고, 그들이 불편한 '의무'를 감수했을때 돌아오는 '댓가'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과거에는 '노동'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유용한 사회적 존재로 승인'받는다는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가사노동이 축소되고, '공부'의 의무만이 주어진 상태에서 쥐어진 용돈을 통해 '소비'는 그들이 주체로 인정받는 경험을 제공한다.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따지지 않고 '용도'와 '유용성'에 부응하는 상품을 제공한다.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은 즉각적인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소비주체'에게 교육은 흥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은 수업이라는 고역을 '불쾌함'이라는 '화폐'와 교환한다고 설명한다. '수많은 불쾌함을 견디고 가게를 꾸리고 있다'는 아버지로부터 '남편이라는 불쾌감'을 견디어 내는 어머니로부터 불쾌감이라는 화폐를 배운다.(적나라하지만 사는게 그렇다) 자기선택과 자기결정을 통해 감당하는 자기책임은 사회적 상호협력관계에서 개인을 고립시킨다. 이렇게 외로운 아이들이 자라난다.

 '왜 일해야 하나요?' 자발적 실업자들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결정한다. 알량한 일당에 불쾌함을 파느니, 평온하게 살테다. 그리 사는게 나의 뜻이니 상관말아라. 논리전개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파이프를 통과해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노력에 대한 확실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편이 속편하다. 구조적 약자는 성취의 경험이 많지 않다. 그런 까닭에 쉽게 포기한다. 충족한 조건에서 성취감을 만끽한 강자는 실패의 리스크가 크지 않아서 도전의 여지가 많고, 결국엔 성공한다. 양극화는 확장된다. 이게 바로 '시크릿'이라고 불리는 '자기개발서' 혹은 '자기최면술'의 실체이다. 그래서 자기개발서는 희망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88만원세대'의 결론과 공히 소리높이는 해결책은 '상호연대'이다. '중간공동체'의 회복이라던지, '사제관계의 회복'이라던지 결국은 '시장경제'에 휘둘리지 않는 '교육'의 회복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양심의 거리낌없이 쭈욱 2류지향이 되기로 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는 2류이기도 쉽지 않다만.

 

- 밑줄긋기-

 아이들은 먼저 '변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습 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외계의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학습'의 인류학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학습'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에 비하면 시장경제와 등가교환의 원리가 인간 세계에 도입된 시기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시장원리를 들어서 학교 교육에 맞서는 아이들은 말하자면, 인류학적인 진화의 흐름에 역행하여 싸우는 것이다.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결코 성장.변화할 일이 없는 소비주체에 안주하는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청한다. 하지만 이 요청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다. 아이들을 외계의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p.80-81 )

 만약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면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예컨대 부모라든가) 묻는 편이 훨씬 유용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외국까지 가서,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고, 그 결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고로 '나를 찾는 여행'의 진짜 목적은 '만남'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나에 대한 지금까지의 외부평가를 재설정하는 데 있다고 본다. ( p.82 )

 자기밖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행동하기보다도 개인의 흥미와 관심에 따른 행위를 더 바람직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널리 유용하다고 인지된 가치일지라도 '내 입장으로 봐서' 유용성이 확증되지 않았다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모든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교육 붕괴의 가장 근본이 있다고 본다. ( p.83 )

 일반 기업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사이에 학력과 능력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우 면이나 장래의 전망에서 커다란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우 면이나 장래의 전망에서 커다란 차이가 발생하는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본다. 노력에서 아주 작은 투입차가 성과에서 거대한 산출차를 낳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p.97  )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을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진다'는 것을 원리로 하여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 p.120 )

 기업에서도 한때, '성과주의'라고 해서 컨설턴트를 고용하여 다양하게 성과를 평가하고자 시도하였다. 적절하지 않은 평가를 내림으로써 조직이 입어야 할 손상을 생각하면 웬만큼 정밀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성과주의에 입각한 인사고과는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신뢰성이 높은 정밀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방대한 자원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적절한 인사고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고, 냉정하고, 능력이 좋아서 어떤 일을 맡겨도 척척 처리해 낼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기업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귀중한 인재를 모조리 끌어다 평가활동에 투입해 버리면 기업은 사업 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 실제로 모든 기업이 어느 단계까지 해보다가 '성과주의는 포기하자'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개인의 성과를 평가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평가 비용이 평가가 가져올 이익을 초과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 p.189 )

제가 전문가도 아니면서 교육론과 니트론을 재구성하는 게 급선무라고 했던 이유는 니트를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노령에 이른 니트를 향해 "자기책임이니 당신들 맘대로 굶든지 죽든지 하라"는 논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결정한 것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논리가 니트를 만들어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니트가 된 사람은 자기책임이니까 당신들 맘대로 굶든지 죽든지 하라"는 논리를 정론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 무수한 니트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너희들을 부양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물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 '너희들'이 격증한다는 역설적인 사태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굶어죽을 리스크를 자기결정을 했기 때문에 감수하겠지만, 우리는 너희를 굶어죽게 두지는 않겠다."는 논리를 '상식'으로 등록하는 길만이 니트가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 p. 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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