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非) 그게 아니고
전영화 지음 / 더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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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금강경 해설서 첫 번째로 읽기는 좀 그렇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순서로 읽어볼 만하다2007년에 나온 책불교학자나 스님이 아니라 재가 신자랄까 야인의 책서술 방식도 야인스럽다.


저자는 MBC PD였다가 그만두고 사업한다고 하다가 잘안되는 와중에, 지리산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저자 본인이 8년 동안이나 금강경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내 보기엔 집중적으로 들입다 팠다는 느낌은 아니다나름 신비 체험도 했던 모양인데 그걸 내세우지 않고, 반대로 <인간극장>, <PD수첩> PD 답게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캐고 들며 좌충우돌한다비판적 문헌학의 칼날이 거의 쑤시고 지나가지 않은 불교 경전 연구 판에 아주 기초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맨 뒤의 해인사 경판 사진 부록을 빼면 370여 페이지의 컨텐츠 중에서 300페이지 가량이 금강경을 둘러싼 소위 썰들이다구어 스타일에서 도올 선생의 영향도 느껴지는데별로 높게 평가는 안하는지 'TV 출연을 즐겨 하시는 그 분'이라는 정도로 몇 번 언급한다.



구마라지바 번역판을 메인으로 놓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산스크리트 금강경 텍스트조차 모두 원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 분야 권위자인 에드워드 콘즈도 영역판에서 13장 이후로는 혼란스러운 찌꺼기라고 했으니 말 다했지..금강경은 전승 과정 중에 수많은 끼워넣기가 있다고 심증 하고, 특히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이책을 암송하면 너와 니집이 흥하고 업장소멸되고 복이 무진장할 거라는 식의.. 행운의 편지 류의 번식 유전자 meme같은..) 유통분’ 에 해당하는 상당 분량을 과감하게 덜어내 버리고, 금강경에서 보살이 극복해야 하는 주요키워드 중의 하나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중에서 '아상'을 제외한 나머지 들은 후대에 덧붙여진 걸로 보고 삭제해버린다윤회 전생이나 아수라, 천상계 존재가 나오는 구절들도 지워버려서 아주 합리적 텍스트로 만들려고 노력한 거 같다. 새로 번역한 문장도 깔끔하고 발음하기도 편하고 소탈해서 낭송하기에도 적합하다.



또 관례처럼 도입되었던 소명태자의 32장 챕터 나누기도 부정한다기존 장 구분법으로 억지로 떼어놓았던 챕터와 챕터 사이를 연결해서 읽어보라고 권하는데시험해보면 과연 저자의 말이 맞다상 흐름을 끊어놓았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붓다 사후 500년에서 700년 후에나 출현한 금강경이 싯다르타 붓다의 오리지날한 가르침이라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않는다딱 한 군데에서, 설령 싯다르타 붓다가 안 썼다고 치더라도 깨달음의 수준이 붓다와 엇비슷한 어떤 인물일 것이라고 추정해보지만, 뒤에 가서는 마치 잊어버린 것처럼 붓다의 말씀이라는 원래 가정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가버린다.



현장 번역본은 번잡하고 쓸데없이 말만 늘리고 잘난척하는 판본이라고 2류로 쳐 버린다.



또 천태종의 시조인 천태 지자 대사가 말했던 소위 '5시판교'를 그저 중국인스러운 억지라고 해버리는데, 이게 뭐냐면 쉽게 말해 8만대장경이 모두 붓다가 한 말이긴 하지만 시기별로 그 가르침을 스타일까지 확확 바꿔가면서 했다는 (화엄경->아합경->방등부 경전-> 반야부 경전 ->법화경, 열반경) 류의... 개소리인데이 소리를 탄허 스님이나 그밖의 아주 이름 높은 한국의 고승들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형편...공부로 밥먹고 사는 학자들까지도 좀만 파보면 다 알 일인데 파장이 두려워 임금님은 벗었다라고 웨치지 못하고 쉬쉬하고 있는 것이다그밖에도 몇 가지 더 있다.



반대로, 저자가 파격을 좋아하다 보니 합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억지를 부리는 데도 보인다저자는 혜능이 듣고 깨달았다던 응무소주 이생기심’(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라는 구절은 산스크리트 원본에는 없고 구마라지바가 창작해 넣은 거라면서그 구절의 창작이 오히려 절묘해서 이 번역자가 위대한 거라고 칭찬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확인해 본 결과, 10장에 나오는데


yan na kvacit 어떤 것에도 prathistam 머무르는 cittam 마음을 utpadayitavyam 일으키지 않아야 하나니 (= 구마라지바: 應無所住 而生其心/ 현장: 都無所住 生其心)



 원문에는 그게 앞 쪽에 나와있는 구절인데 구마라집이 번역을 할 때 문장 순서를 살짝 바꿔 뒤로 옮겨 놓았을 뿐,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없는 걸 지어낸 건 아니었다이상하게도 현장의 번역도 그 구절이, 물론 다른 한문 번역이지만, 뒤로 옮겨져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산스크리트 원본이 구마라지바나 현장의 한문 번역나왔을 당시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이처럼, 저자는 산스크리트 금강경이나 현장본을 꼼꼼하게 비교 대조해보지도 않고 다 읽은 것처럼 단정적으로 일반화해서 퉁치는 식의 판단을 종종 한다. 


이 책에서 알게 된 건데, 소명태자 장 구분으로 21장에 해당하는 부분은 구마라지바가 아예 번역을 생략해버린 부분인데후대의 편집자가 산스크리트 원본과 비교해보고 빈 자리를 보리류지의 번역판에서 뽑아다가 끼워넣은 것이라는 걸 알고 머리가 띵해졌다어째서인지 그 부분에서만 수보리는 ‘혜명 수보리라고 네이밍이 되어있었던 것이다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읽는 구마라집 한문 판본 중 21장은 다른 번역자의 판본이 대신 끼어들어가 있는 것이다저자는 구마라집이 그부분을 필요없는 번역이라고 과감하게 생략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8만 대장경은 경판이 8만 개 정도지 책으로 환산하면 7천권 정도라고 한다물론 그 권수 개념은 오늘날의 단행본 책 한권 볼륨보다 훨씬 적다.



이상한 덤이지만, 바그너의 오페라 'Flying dutchman'은 유령선을 뜻하는, 항해인들 사이에서 쓰였던 속어란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서구 신문물이 막들어오던 메이지 다이쇼 시기의 일본인이 잘못 번역한 거래.. 이런 잘못된 관행도 한번 굳어지면 쉽게 고쳐지지 않듯이 불교계에도 그런 게 많다고 지적한다옳으신 말씀천수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관세음보살이 전해줬다는 신묘장구대다라니 구절 구절에서 쉬바 신비쉬누 신크리슈나가 불쑥 튀나오는 거 정도는 애교 포인트밖에 안된다또 그러면서 산스크리트 발음이랑 상당히 다른 걸 외우면서도 '발음이 중요하니까 번역하지 말고 뜻도 모르는 게 더 나으니까 그대로 외우라'고 한다. 저자는 이 정도 관행은 그냥 덮고 지나갈 정도로 온건하게 현실을 감싸면서 보는 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유익한 점 또 하나는 우선 불교를 좀 많이 아는 일반인과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면 독자 입장에서는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짚어보고 따져보고 습득할 있다는 점이 그렇다싯달타가 유언으로 남겼던 말 자등명법등명을 잊지 말자또한 도올 선생의 책이 그렇듯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곁가지 잡설들도 대체로 활달하고 호방한 필치로 씌여져서 술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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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 붓다의 진의를 추적하다
이승명 지음 / 한솜미디어(띠앗)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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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의 아버지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 썼다는 헌사에서부터 물음표가 몇 개씩 떠오르는 책이다. 저자의 바램과는 달리 일단 읽기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책은 한문번역본 다섯개, 영어 번역본 3개를 토대로 주로 번역 논평을 중심으로 전진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요 공격 타겟은 - 구 번역이 간결하고 운율이 아름답다며 칭찬도 가끔 하긴 하지만...-  구마라지바의 번역본이고 상대적으로 현장 번역을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현장 역을 편들어주기 위해 콘체(콘즈)나 뮐러의 영역을 간간히 참고하고, 금강경이 포함되어있는 다른 반야부 경전 특히 8000송 반야경 참조를 많이 한다. 그런데 한글 번역을 위한 소스가 되는 원본 문장을 책에다 안 실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일부 구절만을, 그것도 저자 나름의 한글 번역으로 다시 투과해서 곁에 붙여놓고 비교를 했다. 그렇게할 거 거면 독자가 어떻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을 하나? 

게다가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저자의 문장이 상당히 좋지 않다. 문단 단위로 보면 체계적이지가 않고 때론 횡설수설처럼 난삽하다. 문장으로 쪼개서보면 비문이 많다는 말은 아니지만 문장에서 쓰이는 지시어, 대명사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는 데가 허다해서 이 책을 완독하는데 1달이나 걸리게 하는 데 주요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 위해 아이러니 하게도 함께 펼쳐놓은 각묵 스님의 금강경 강해를 많이 참조했다.

*

저자는 본인만의 금강경 번역을 고집하기 위해 산스크리스트어 원전을 자주 끌어오는데 몇몇 군데는 본인 해석을 고집하기 위해 원문의 다른 곁가지 의미들을 생략한 데도 있다. 그걸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본에 산스크리트어 문장이 알파벳 음차로 전문이 실려 있어서 구글 산스-잉글리쉬 사전에 넣어보고 미심쩍은 대목에서 대조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명태자 분류법으로 32절 중, 4절의 첫 구절, 구마라지바 한역에 따르면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한다)

저자는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도 구마라지바가 붓다의 원뜻에서 벗어난 해석을 했다고 지적하면서  "또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대상에 의존하여 보시를 해서는 안된다"고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거로 든 것은 물론, 산스크리트어 역본인데, (물론 현재 리뷰하고 있는 이 책에는 원문이 빠져있음)

api tu (그런데) khalu (진실로) punah (다시) Subutte (수부티여) na bodhisattva (보살이) vastu-pratisthitena (경계에 머물러) danam (베풂이) datavyam (주어져서는)

산스 원문 vastu의 어근이 vas= to dwell니까 vastu는 그 어근의 명사형인 residence 즉, 장소의 의미로 해석하는 한 가지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한편  thing이나 substance 로 옮길 수도 있는데, 구마라지바는 이 단어를 法으로 옮겼고 현장은 事로 옮겼다. 각묵 스님 번역은 이 vastu를 장소의 의미와 '법'의 의미를 함께 살리면서 문장 전체로 나아가서는 '보살은 특정한 경계 (의미의 장소)에 고착되서 머무르지 않는다' 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이 또한 산스크리트 원문의 골격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치가 통한다. 
 
저자는 현장 역 편애를 드러내면서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고 구마라지바가 틀렸음이 분명하다고 단정짓는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아마도 영역자 세 사람 중 두 사람인 콘체와 레드파인이 vastu를 a thing으로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쪽에서는 장소를 나타내는 vastu의 의미가 사물 또는 대상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니까, 그것을 핸들링하는 동사 pratisthitena 또한 '머무르다'에서 '의존하다'로 바뀌는 것이 순리일 것이고, 이 동사의 원어는 물론 그 두가지 해석 가능성을 다 허용한다. 저자는 구마라지바 역에서 應無所住의 '住' ='머무르다'라는 해석이 본인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그걸 '의존한다'로 고쳐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는데 저자의 대안 번역을 허용한다고 해도 취향의 고집 이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일독만으로도 발견된 이런 석연치 않은 해법이 몇 군데 더 있었다. 구마라지바 한역이 신성불가침이라는 건 아니지만, 공격을 하려면 관련 근거들을 보강하거나 텍스트 자체만 가지고 후벼판다고 하면 좀더 논리적으로 치밀한 변명을 갖추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학습노트를 묶어놓은 정도로 보인다. 이 물건을 원문에 구애받지 않도록 일반 독자를 읽으라고 깔끔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법조인이신 듯한데, 보통 법조인들 사이에 오고가는 외계어같은 법률용어는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될 때 권위를 얻겠지만 아버지에게 읽히기를 바라면서 썼다는 이 책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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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 그래픽 평전 푸른지식 그래픽 평전 4
야론 베이커스 글.그림, 정신재 옮김, 서동욱 감수 / 푸른지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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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에서 '상급'으로 분류된 걸 5천 몇 백원 주고 샀는데 펼쳐보니 

앞 속지와 뒷 속지가 찢겨져 있네..

그래서 한번 보고 되팔려 버려질 운명인 책.

 

바루흐, 또는 벤투, 또는 베네딕투스 스피노자 생애에 관한 책은 처음 읽는다.

1633년 출생으로 그의 삶은 네덜란드의 경제적 최전성기와 겹쳐진다.

 

하지만 결코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었고 전쟁과 종교 분쟁으로 얼룩진 시기였으니 바루흐는 박해를 피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도망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청과물과 견과류 장사꾼.

바루흐가 다섯 살 때부터 가세가 점점 기울다가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부친이 폐병으로 사망해

장례를 치른 직후 빚과 함께 가업을 물려 받았다.


엄마와 큰 누나, 큰 형은 폐병으로 진즉에 사망한 상태였고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가 살아있었음.

 

바루흐 또한 마흔 네살에 폐병으로 죽는데..


폐질환이 집안내력의 지병이었던 건가?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부모가 같은 폐질환으로 사망했으니

 

이 경우는 가족이 공유하고 있는 잘못된 생활습관이 크다고 본다

취사나 난방 용도로 불을 오래 사용하는데 환기를 안 시킨다든지..

식습관도 그렇고 집안 마다 의외로 드러나지 않는 

생활방식의 차이가 크다는 걸 확인한 적이 있다.

 

 

심지어 바루흐는 장사꾼 일을 접은 대신 

생계 수단으로 렌즈 깎는 일까지 했으니

유리 미세 입자를 오지게 마셔서 수명을 더 단축했던 모양.



 

서문에 라틴어 번역이 잘못되어 있다. 라틴어를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지만 

대충 영어랑 비슷하니까 금세 오류를 눈치챌 수 있는데 

대체 출판사 교열은 뭐한 걸까

감수했다는 서강대 교수 서동욱 씨는 뭘 한걸까?


ignorantia non est argumentum ->


 Ignorance is no argument. 

 

' 무지는 논증하지 않는다' ' 무지는 논거가 될 수 없다' 정도가 맞겠다




바루흐가 유년기 때 본 랍비들의 논쟁번역판에는 편집 실수로 대사가 뒤바뀌어 있다.


팔짱 낀 한 쪽은 카발라에 심취한 정통파이며 유대 민족 한 셋트 구원론자.

다른 한 쪽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였던 이슬람권 학자인 마이모니데스 신봉자.


즉 유대인이라도 죄지으면 하늘로 들어올려지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는 

반쯤 가톨릭화한 온건론자.



 ...


바루흐가 어린시절에 본 종교적 스캔들이며 그의 앞날을 예견하는 사건.


스페인 종교 박해를 피해 망명을 왔더니 이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부에서도 종교 분쟁은 있었다.


역시 스페인에서 건너온 위리엘 다 코스타라는 자가 

유대교 경전의 신성을 부정했다가 파문을 당했다.

이후 고립이 심해지고 견디다 못한 위리엘이 반성한다면서 유대 공동체의 품으로 돌아 왔더니....

1차 처벌로 등짝에 채찍을 맞은 후..

 



2차 처벌로 시나고그 (유대교 회당) 문앞에서 동포들에게 밟힘, 이틀 후 자살.

바루흐가 일곱 살 때 목격했던 사건으로 어린 기억에 큰 충격이었을 거임.

 

이후 스피노자 또한 데카르트 철학에 심취해서

유대인 동료들을 멀리하고 이교도 계몽주의자들과 어울리면서

토라의 신성을 부정하는 말들을 흘리고 다니다가

랍비의 충고를 몇 번이나 듣고도 뉘우치지 않아 결국 파문 당했다.

 

아버지의 유업인 청과물과 향신료 장사를 하다가 스물 한 살에야,

같은 시장에서 거래 하던 이교도(?) 네덜란드인 장사치로부터

책방 주인이자 동네 사설학원 강사인 프란시스쿠스 판 엔덴 박사를 소개받고

삶의 방향이 확 달라진다.

 

터닝 포인트이자 철학 인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판 엔덴은 가톨릭 예수회 신자이면서 초기 계몽주의자로

스피노자에게 라틴어와 자유주의 정치사상과 데카르트 철학을 가르쳐준다.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정을 받기 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쭉 살았었고 그가 죽은지도 5년 밖에 안되었을 때였다.)

 

책방 교습소 서클에서 만난 다른 학생들이, 훗날 박해를 피해 

떠돌던 스피노자의 경제적 정신적 스폰서가 되어주었고

그를 중심으로 한 추종자 서클이 거기서부터 형성된다.

바루흐는 판 엔덴의 집을 들락 거리다가

선생 딸래미와 일생 단 한 번의 연애에 빠지기도 한다.

책에만 빠져 있어서 관계 관리의 기름칠을 안하고 방치하다가

다른 동료에게 가로채임 당하지만.. 이후 평생 독신으로 삶.

 

 

파문 당한 이 후에는 유대인 이름 바루흐 대신

라틴어 식 이름 베네딕투스라는 이름을 고집하게 된다.

상인 시절 벤투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이건 포루투갈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에 애착하던 시절에 쓰던 이름임.

 

  셋 다 '축복받은 자'라는 뜻.

 

 베네딕투스의 20대와 30대 시절 까지 세 차례에 걸쳐

 네덜란드는 영국과 큰 해상 전쟁을 벌인다.

두번째 전쟁에서 세 번째 전쟁으로 건너 가는 사이에는

 흑사병이 돌아서 수만 명의 시민이 죽어 나가고,

 재림 예수라고 자칭하는 사비타이 제비라는 사람이 나타나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현혹했다.

 이 광신에는 바루흐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쳤던 노 랍비와

 바루흐의 친 남동생도 휩쓸렸다. 1660년대의 일.

 

1670년대에 들어서자, 네덜란드의 페리클레스라고 할 수 있는,

 지난 20여년 동안 공화국의 자유와 관용과 상업 정신의 정치적 보호자였던

 재상 요한 드 비트가 거리에서 정치 폭도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하고

 배가 갈리고 내장이 꺼내진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서

 숲속 짐승의 밥이 되는 사건이 터진다.

 

스피노자 사망 2년 전의 일이다.

 

 

 스피노자의 친구 하나가 성경을 비판하는 책을 냈다가 감옥에 갖혔다가

 가혹한 환경에 병사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14년 동안 고심해오던 에티카 저술 작업을 마침내 완성보긴 하지만

 이런 저런 사건들을 목격한 후

 결국 출판을 보류하고 얼마 안되서 죽는다.

 친구들에게는 서랍 속의 유고들을 남기고

 그 밖의 다른 재산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으니

 

 후원자 그룹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근근히 버텨온 셈이었다.

 

 ....

 

이 작품은 주로 종교적 독단과 정치 투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스피노자의 노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정치적 노력을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의 얼개에 대해서는 

겉핥기 식으로라도 부족해 보인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말풍선 속의 대사가 뒤바뀐 

어이없는 실수가 보이고,

 '하나님''하느님'을 뒤섞어서 쓴 것도 

아마 부주의 탓이겠지만 거슬린다.

 

그럼에도 생애와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니 

그가 한 개 유한한 신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패시브한 무력감을 느끼며 어떠한 영향을 감내하며 살아왔나 

실감나게 시뮬레이션하면서 볼 수 있었다.

 

 

역시 철학 사상이란 가치중립적인 기하학 해법이 아니라 

수난 당한 자의 생애가 튕겨내는 창조적 반동이자 숨은 이력임을 재확인한다.

 

 

당시의 네덜란드는 고대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나 중국의 전국시대처럼

전쟁의 한복판이면서 국가 단위로 볼 때는 부를 바닥내거나 

역동적 에너지를 잃지 않는 그런 시기였다

소모와 생산적 충만 사이에 끼인 듯한 이런 비스듬한 컨디션에서 

문화 토양도 융성해지는 거 같다...

 


형이상학 종교 예술 등 궁극의 지식은

결국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있느냐 라는 심판대 앞에서 가늠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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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의 유혹 - 철학이 세상 이야기 속으로, 세상 이야기가 철학 속으로
신정근 지음 / 이학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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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게 아니라 못쓴 책이다. 논리적으로 흐리멍텅하며 대강 퉁치고 가는 문장이 꽤 많고, 이모티콘이나 더 생각할꺼리 꼭지까지 넣느라 애쓰긴 했는데 주제 차원에서 혼란스럽고 중구난방. 19년 전엔 신선한 시도였다며 높게 쳐줘야 할까? 그리고 기습 번트 안타에도 못 미치는 철지난 아재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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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줘 2021-08-1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념의 역사로 갈래를 잡고 갑골문으로 한자의 기원을 따지는 건 이 책이 나왔을 2002년 당시에는 1g 신선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어설픈 PC스러운 오지랍에서 도대체 이책이 어떤 의미에서 동양철학에서 길어올린 지혜를 암시하는지 알 수가 없어진다. 저자 신정근이 누리고 있는 평가 잣대는 차라리 피터 싱어와 같은 교과서적인 서구 윤리학에 가깝지만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심정적인 배려 또는 퍼주기 쪽이다. 총체적 난국인 독서 경험이었지만 꾸역꾸역 끝까지 읽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성인지 감수성 트러블 - 성인지 페미니즘
오세라비 외 지음 / 가을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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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기 훨씬 전부터 나는 유튜브에서 유재일 님, 오세라비 님, 여명숙 님 채널의 팔로워였다. 문재인 시대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K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기꺼운 마음에 서평단 신청을 했다.

 

 

일괄하자면 한국의 페미니스트와 여성단체들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서 어떻게 나라를 말아먹고 있나 하는 내용이다. 분량은 100페이지 조금 넘고 저자가 세 명, 거기다 추천사가 일곱 개나 된다. 정세에 맞는 기동성 있는 개입을 우선시하는 소책자 정도로 보면 되겠다. 차례의 세부 타이틀만 훑어 봐도 논지의 방향과 목표가 어떠한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내용 요약 좀 더 해 보자. 오세라비 님의 꼭지는 성인지 감수성개념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생했고, 그 개념이 일차적으로 표방하는 바와는 다르게 어떠한 이면 전략에 따라 작동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들 집단이 어떻게 국가 정책과 예산을 빨아먹고 있고,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보편적 평등으로 위장 한 채 학교 교육으로 침투 전파해나가기 시작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성 평등을 수단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여성 단체들에게도 인맥이라는 게 있고, 연줄에 따라 낙하산 공무원을 곳곳에 심고 있으며, 여가부가 비대해지고 성인지...라는 머리말이 붙은 각종 사업의 예산 규모를 불려나가고 사실상 성별 문제와 별 관계없는 일들을 심사하고 평가하는 방식으로 타조직 속으로 세를 확장한다. 이 따위 풍경. 진보라는 이름의 위선, 환멸을 지금 문재인 정권 만큼 극명하게 보여준 이전 정권이 있었나 싶고, 그게 과장된 탄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요한 님의 꼭지는 2018년 이전엔 쓰이지도 않았던 이 용어가 어떻게 급작스럽게 이슈화되고 사법부 판례에까지 인용되게 되었는지, 피해자 중심주의를 확대하면서 죄형 법정주의를 무너뜨리고 물적 증거 없이도 단지 피해자(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대개 여자)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만으로 피고소인인 타겟에게 승소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코메디 같은 상황을 지적하고, 다문화 주의와 정체성 정치, PC가 휘어 잡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 특히 스페인이 어떤 몸살을 앓고 있는지 비교 차원에서 들여다 본다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문재인을 포함한 정치인과 사법부 꼰대들이 성인지 감수성을 단순히 양성평등 하자는 취지로만 뭉뚱그려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요한 님은 이를 페미에게 기만당한 일이라고 보지만 다르게 보면 꼰대들 자신이 지적으로 게을러서 대충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묻어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세 번째 전혜성 님의 꼭지는 여가부가 보급한 성인지 감수성 교육 어린이책이 얼마나 치우쳐 있는지에 포커스를 맞춰서 지적한다. 이 글은 매우 짧고, 앞서 두 글에서 언급한 내용 속에 거의 다 포함되므로 실은 빠져도 상관없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책 맨 앞에 붙은 일곱 개의 추천사 다음으로 또 하나의 추천사 정도로 편집되어도 큰 손실은 없으리라 본다.

 

 

공짜로 받은 책이기는 하지만 직언 몇 가지를 해보겠다. 우선 책 구성과 밀도에 불만이 생긴다. 급하게 씌어진 흔적이 보이고, 혹은 어쩌면 처음 기획과는 다른 모양새로 틀어진 게 아닌가 소설을 써본다. 주제를 충분히 소화해서 자기화해서 씌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지금 쓰고 있는 내 글의 울퉁불퉁한 문장에서 보이듯이 말이다. 오세라비 님은 날 것의 보도 자료에 겨우 액자를 치듯 옮겨 적고 있는 것 같았고, 요점에 방점을 찍어야 할 적절한 순간을 놓치고 필치가 표류하는 듯하다. 안요한 님의 글에도 명백히 비문이 종종 보이고, ‘위험한’, ‘황당한’,‘속고 있다등 수식어와 술어를 끼워 넣으며 이미 정해진 필자의 입장을 비치고 있을 뿐 그보다는 좀 더 논증으로 개입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세 번째 글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한 바 그대로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언뜻 스쳐지나갔던 또 하나의 걱정. K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논리로 성의 고귀함, 가족 공동체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향수의 보수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통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선 이탈의 충돌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남조선 페미니즘의 방식에서 가장 분노를 느끼는 점이 픽션 속의 욕망 까지도 등급을 매기면서 문화를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틀어막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사회적 약자가 되므로 잠재적 피해자를 자처하면서, 또는 (되돌이키고 고백할 필요가 없는) 결백한 자가 되면서 문외한인 공중에게 무엇이 진정한 도덕인지 까지 가르치려고 든다. 입장이 다른 상대와 토의하지 않으며 익명으로 몰려다니면서 감정의 칼부림이면 충분하다. 그들의 아빠이거나 삼촌인 자칭 민주투사 출신 - '우리민족 끼리'를 외치면서 3대째 왕조 체제인 북조선을 긍정하는 주사파 따위가 '민주화 세력'이라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586 실무 권력자들에게 엉겨 붙어 힘을 분양 받고, 불복하는 개인에게는 죄의식의 형벌 문신을 더 깊게 새기는 빅 브라더 놀이를 하려고 든다,

 

 

K 페미니즘이 결국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전에 기대 마을 공동체의 도덕을 해석하고 투석형을 명령하는 (시아파 이슬람 식의) 이맘 정치, 이항대립 근본주의에 기반한 사이버 트롤링, 질롯 당원, 잠재적 가해자라고 낙인찍힌 이들의 사생활에 히잡 씌우기라고 본다.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근본주의radical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말을 조금 변형해서 말하자면, 생체 공학이 아직까지 인체 구조를 자유 자재로 개조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가 깃든 신체 유형의 복지를 극대화하려고 드는 이익 집단에 지나지 않는 걸로 보인다. '정의'는 핑계일 뿐. 출세지향을 숨기는 교활이거나, 권력감의 막연한 팽창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그 적나라한 의미에 직면하지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 레밍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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