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不二, a-dvaita)론. 다양성과 개체는 착각이라고 한다. 나마-루파(nama-rupa, 名色)는 조개껍데기처럼 위아래로 맞물려 자기 안에 독실(獨室)을 가꾸는 바디 앤 소울인 줄 알았더니 그저 마야의 흰 너울에 새겨진 형상과 이름의 무늬였다. 전체만이 실체라고 한다. 따라서 윤회도 착각이라고 한다. 전체의 이글거리는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으므로 나도 이 자리에서 떠난 적 없고 눈앞 그림자들만이 오갈 뿐이다. 새삼 불교가 차안-피안의 이원론과 해인海印-화엄의 불이론이 혼재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불이不二 에 '일원론'이라는 덧붙임은 반드시 오역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아드바이타는 그저 '둘이 아니다'는 뜻으로, 둘이 아니면 실상 단 하나임도 주장할 수 없다. '온전한 하나'를 내세우면 그 하나의 바깥이 반사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 도가 현학의 통찰과도 이어지는데, <노자익> 중 '도생일 일생이..' 로 시작하는 도덕경 42편에 대한 이식재의 주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道가 하나를 낳는다. 그것이 道로서 있으면 하나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하나가 생겨나지 않았거늘 어찌 둘을 얻겠는가? 둘이 없음은 하나가 흩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컬어 둘이 아니라(不二) 함은 아직 하나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기대에 훨씬 못미쳤다. '새로운 리얼리즘' 운운하지만, 자연주의로부터 생활세계를 수호하자던 1930년대 후기 훗설의 현상학적 기획과 해석학의 지평론으로 흡수되기에 저자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리 새롭지는 않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과격한 언사를 내지르는데 실제로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세계상(世界像,Weltbild)으로 아우르고 붙잡을 수 없다는 뜻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이 저자는 현상학과 해석학의 방법론에 빚진 바가 커 보이고 포장지만 바꾼 그걸 포스트모던의 대항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문장에서 불필요한 약을 많이 팔고 단칼에 질러갈 수 있는 얘기인데도 어정거리며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타이틀을 인용하는 게 필연적인 밑받침 같아 보이진 않는다. 1급 네임밸류들로부터 추천사를 많이 받아내는 걸 보니 인화력은 상당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