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스님의 금강경에 물들다 - 불안함을 품고 살아가는 인류가 필수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최상의 안심법문
원빈 지음 / 이층버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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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난 적 없는 이로부터 아마도 법공양 차원에서 이 책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게 731, 이미 읽는 중이던 다른 금강경 책을 마저 읽은 후 바로 이 책을 붙들었다. 그 후로 시간이 한참 경과한 다음에야 부랴 부랴 쓴다. 내일 해남 미황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최소 2주는 넘게 머무를 생각. 6월에 한 차례 머물렀고 이번이 두 번째



거의 년째 잠을 제대로 못자고 숨이 잘 안쉬어지는데 병원에서는 진단이 안되는 병으로 몸이 아팠다. 검사를 하려고 하면 거짓말처럼 괜찮아지기도 한다. 현대 의학에서는 즈이들 기준에서 진단이 안나오면 으레 신경성이라든가 스트레스 타령을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이리 저리 몸과 마음이 넝마조각이 되서 돌아다녔다.



기복신앙을 경멸하고 폼나는 냉철함을 애착하여 숫타니파타라든가 초기 니까야 경전 정도에만 약간의 믿음을 줄 뿐 대개는 쿨한 척 무차별적인 거리두기로 일관했던, 돌이켜 보면 심간이 편했기에 가능했던 관조적 구경꾼이었다가, 이제는 지뿌라기 한 줌이라도 앞발로 휘감쳐 보려고 달려드는 물에 빠진 개새끼 같은 꼴불견이 되었고, 불자가 되었고, 매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시간씩 외우면서 관음정근도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금강경 11회 독송까지 시작하던 차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원빈 스님의 유튜브 채널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분의 천수경 책도 얼마 전에 읽었는데 정성 가득하고 영양가도 농밀한 식사 한 상을 대접받은 경험이었다. 채널에서 법공양 게시글이 올라왔길래 별 기대없이 댓글 신청을 했는데 당첨이 됐다. 공짜로 받는다고 해서 주례사 평을 하듯 잘 써주는 성격은 못된다. 하지만 잘 읽었다. 원빈 스님의 이 금강경 책도 역시 농밀하고 푸짐한 정신적 자양분 한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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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으로 설계가 잘 된 물건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서문에서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전체 틀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전체 인상 평부터 하자면 우선 신선하다. 불가의 수행자인 저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일지는 모르지만 야심이 느껴질 만큼 대담한 면모도 보인다. 출처를 밝힌 인용구로 거들먹거릴 수 있는 대목에서도 현학적으로 나열하지 않고, 최대한 일상적인 말을 쓰려면서 실타래를 풀 듯 차분하게 설명한다. 덕담 투의 뻔한 말로 발라놓은 텍스트 또한 결코 아니어서 초심자에게는 따로 각주를 달아야 할 만큼 보충 설명이 필요한 대목들이 군데 군데 보인다. 키워드 수준에서 따로 검색을 해보면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건너뛴 채 지르고 가버리는 대목들이 분명히 있다.



고작 회독에서 느낀 바이지만 이런 딜레마랄까, 대상 독자의 초점이 2중으로 잡히는 저서처럼 보인다. 철학 용어 사용에 낯선 생초보 불자가 바로 달려들기에는 약간 버거워 보이고, 사전 독서로 초심자용 금강경 해설서를 한 두 권 독파한 후 이 책에 뛰어들기를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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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문 읽기에서 논리적으로 선이 살아있고 대담한 구상에, 익사이팅한 감각을 주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원빈 스님이 보기에 금강경은 우선 안심법문이다. 인간은 구하는 바가 있어서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것. 사바세계는 참으로 참아야 할 일이 많은 곳인데, 그 속에서 중생들은 오히려 스스로의 고뇌를 증폭시키는 근본적인 착각을 한다.


1) 뭔가를 얻어야 행복해진다는 것 2) 얻어 가질만한 대상이란 게 있다는 것. 


금강경의 저자는, 또는 좀 더 광범위하게 퉁쳐서 반야 공 사상의 그늘 아래에 있는 붓다의 가르침은 이 검증되지 않는 두 가지 전제야말로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얻어야 할 대상도 없고 뭔가를 얻어야 행복해진다는 것도 착각인데, 이게 라벨의 볼레로처럼 안으로 갈마들면서 집요하게 반복되는 금강경이라는 나선형 모티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 금강경은 지혜의 코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비전을 훈련시키는 실천 지침서로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비유들, 인도인들 답게 터무니 없이 벌려놓은 극대-극소의 간극이 인상적인 비유들은 반복 침투를 통해 중생의 훈습을 녹이는 가설적인 이미지 실험이기도 하며, 동시에 독송자 자신의 사유 틀을 확장하고 깨뜨리고 변형하는 훈련법이 될 수 있다는 함의처럼 읽혔다.



인도 산스크리트본 금강경과 비교하면서 원빈 스님은 기존의 중국 금강경이 반야지’ (paramita)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한다. 보리심을 중심으로 금강경을 재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하는 것이다. 지혜와 더불어 자비행, 두 개의 날개처럼 균형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원빈 스님의 전작인 천수경 해설서와 마찬가지로 샨티데바의 <입보살행론>과 원보리심-행보리심의 틀이 이 금강경 독서에서도 중요해진다.



석가모니불의 인터뷰어인 수보리 존자는 원래 해공제일이라기 보다는 자애선과 무쟁삼매의 아라한에 가깝다. 여기서 대담한 가설이 등장하는데, 이 수보리 존자를 따르는 학파가 실존했을 거라는 것이고, 이들 학파의 종교 개혁, 또는 불교 르네상스의 일환으로 등장하는 초기 대승경전 군 중의 하나가 이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부파 불교의 철학적 논쟁으로 갈가리 찢어겨 승단을 다시 하나로 화합시키자는 것. 석가모니불은 오래간만에 제자를 만나면 세 가지를 물었다고 한다.


우선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 도반과 다투지 않고 잘 어울리고 다니느냐, 게으름 안피우고 스스로를 독려해서 수행 정진하고 있느냐.’


탁발, 화합, 정진(불방일). 이것이 금강경 수행의 핵심인 무주상보시로 이어진다. 무상無相으로 (집착하는 상 없이) 화합하고, 무주無住(머무름 없이) 불방일하고, (댓가 없이 주고 받는) 보시布施로 탁발한다. 이로써 수보리 존자의 으뜸 미덕인 무쟁의 가치가 재생된다.



*


 언급할 만한 모든 대목을 이 자리에서 다 다룰 수는 없고 몇 가지 우선적으로 기억나는 것들만 더 적어본다.


1) 실천적 중도를 마음의 조율, 즉 악기의 조율로 비유한 대목은 특기할만 하다.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중도에 도달하고 끝마쳐 버리는 것이 아니다. 현악기의 현을 조절하듯 이 조율은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실력있는 악사일수록 감각이 예리하기 때문에 연주가 한곡 씩 끝날 때마다 다시 조율을 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매 순간 재조정 해야할 것이다. 조율 작업이 반복될 수록 익숙해지고 능숙해질 수는 있겠지만, 육신이라는 거대하고 낡은 외투를 끌고 다녀야 하는 인간 게임의 마지막 날까지 중도의 최종 지점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보리심의 두 기치인 자비와 반야의 마음 또한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켜서 조절해야 한다. 반야에 치우치면 죄다 헛것, 죄다 없음이라고 퉁치고 치워버리는 무병無病에 빠지게 되고, 자비 쪽에 치우치면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실유 중생에 대한 고뇌의 실감에 짓눌리게 된다.



2) 무상, 상이 없음, 상을 깨는' 깨달음은 무주, 머무름 없음을 갈고 닦음으로써 도달한다. 이 무주를 사띠, 늘 깨어있는 봄’, (카메라로 치면) ‘포커스를 하나의 대상에 고정하지 않으면서 전체 화면이 흐려지게 방치하지 않는 기민한 시선’, ‘mindfulness’의 훈련으로 획득될 수 있다고 본다. '마인드풀니스'의 정반대편에 얼빠짐이 있다. 좀비화 상태란 얼빠진 놈이 되는 것이다. 고장난 기계 같은 무의식적인 반복, 경련하듯 반복, 도무지 환상의 목표값에 도달할 수 없음에서 오는 가려움증과 조바심과 신경질, 꽃도 아닌게 피어나는 증상symtom, 조리 없이 아귀가 맞지 않는 습관들, 관습들, 덜컹거리면서 어쨌거나 돌아가는 이빠진 톱니바퀴들, 사회화-자연화-상식화 되었기에, 즉 일상이라는 유동액 속에서 뒤엉켜 하나가 되었기에 그 추함이 우스꽝스러움이 툭 비어져 나오지 않은... 따라서 사띠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틈바구니를 벌리듯이 시작할 수 밖에 없고, 외부 대상에 대한 가치규정을 모두 괄호 안에 쓸어 넣고 판단중지를 한 채 다만 깨어서 바라보는 자기 쪽을 다스리는 경험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3) ‘법집에 대하여 모든 상에 대한 고집 중에 가장 강렬한 분노를 폭발 시키는 게 법상이라는 지적도 재미있다. 개인의 탐욕이나 분노는 오히려 금세 사그러든다. '내' 주장이, '내 '이데올로기가, '내' 종교가, '내' 도덕적 가치가 옳다는 생각에서부터 오는 분노가, 증오가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앗아갔는가 생각해본다.


이건 원빈 스님이 아닌 주석에 주석을 달 듯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생각이지만, 최근 목격한 몬도가네의 광경들, 주장하고 단체로 떼를 쓰면 피해자가 되는 피해자주의 포퓰리즘, 궁예 관심법으로 증거 절차를 초월하는 공감 능력 제일주의, 청교도적인 비장함이 감지되는 PC주의의 광풍을 보면 겹쳐지는 바가 많다.


 

4) 재가불자인 선남자 선여인이 가장 이무롭게 착수할 수 있는 수행- ‘시계생천施戒生天, 즉 보시와 계율수행을 통해 하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물론 천인이 되는 것도 윤회 코스의 일부이므로 우주적 drop-out인 열반 해탈과는 다르다. 금강경 전반을 통해 강박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게 보시 중에서도 으뜸인 법보시다. 수지독송-사경과 사구게 해설. 이 책도 그러한 일환으로 받게된 듯 해서 감사한 일이지만, 이 지리멸렬한 독서평도 법보시에 해당은 될까



*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이 책에서 칸트의 물 자체 Ding an sich’ 개념이 불교 용어들과 섞여들어서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는 거다. 모든 상을 해체하는 금강경의 ..논리가 현상계와 대비되는 칸트의 물 자체 개념을 단 한번 스 치고 가면서 비교되는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여러 페이지에 걸쳐서 물 자체 개념이 등장해서 곤혹스러웠다.



예를 들어 134페이지에 나오듯 “ ‘존재한다라는 것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독립적이고 영원불변하다는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는데 이때, 32상을 구족한 부처님의 오온은 연기적으로 변화하고 조건에 구속되기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존재한다라는 것은 순전히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온 실체개념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 때 가능한 언설이다. sub-stance = () 밑에-놓여있음. 파르메니데스-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케이메논. 제논이 역설하듯이 날아가는 화살은 (공간을 이동하면서) 없는 자리에서 있는 것이 되고 있는 자리에서 없는 것이 되므로 환상이라는 것이다. 즉 변화는 착각이라는 것. 마치 토대가 상부구조를 떠받치고 있듯이, 맨 밑에 자리하면서 다른 우연적이고 변화무쌍한 허깨비 부스러기 장난들을 등에 이고 있는 기체(基體). 이때 칸트의 물 자체도 기체, 즉 실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실상은 연기적 실재인 물 자체와는 다릅니다.”(134p)



칸트에 따르면 공간-시간 형식까지 실제하는 게 아니라 인식 주체가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해 불가결하게 끌어다쓰는 분류 상자이므로 현상계의 뒤편에 놓여있는 물 자체야말로 실체 그 자체. 따라서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컵도 물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더 이상 컵이라고 볼 수 없는, 상식의 언어 공동체에서 지칭하는 이라는 낱말로 더이상 부를 수도 없는, 늘 벗어나 있고 초과하는 무엇이겠지만, 주관이라는 감옥 안에서 나는 감성-형식, 이해력이라는 보편적 붕어빵 틀에 결박되어 있으므로, 경험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틀을 선험적으로 (a priori하게) 옆구리에 끼고 들어갈 수 밖에 없으므로, 실체적 진리는 영영 모르고 결코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시공간 형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물 자체를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  맥락과 체계 속에서 규정되는 철학의 관점으로 볼 때 서로 다른 지평을 가진 개념들을 뒤섞음으로써 발생하는 이러한 껄끄러운 마찰이 몇 군데 더 있는데, 개인 의견이지만 물 자체를 그냥 실재정도로 바꿔주는 게 더 좋을 듯 싶다.



*


이 책에 대한 평을 더 잘써 보려는 욕심이 부담감이 돼서 지금까지 미루고 질질 끌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기에 단숨에 질러 본다. 글쓰기조차 가오-후까시를 내려 놓으니까 오히려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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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밖으로 빠져나온, 흠뻑 젖은 개새끼로 새출발할 그날을 기다리며.



그 앞에서 향 사르고 요령을 흔들며 비위를 맞춰야 하는 전설적인 물귀신이 되기 보다는 두 발이 안되면 네 발로라도 땅을 딛고 선, 빨빨거리고 댕기는 현세 중생 한 마리가 되는 게 더 낫다. 허겁지겁 올라선 그 자리가 ‘건너편 언덕이 되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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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모든 질문에 답하다
마저리 무삭치오 & 크레이그 호웰 지음, 우은수 & 송몽채 옮김 / 은하문명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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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할만큼 번역이 형편없다. 내용면에서도 의문이 생기는데 예전 관세음보살은 친견한 이들에게 주파수와 진동수에 대한 언급을 한번도 안하다가 왜 지금와서야 봇물 터지듯이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는지. 채널링 메시지조차도 유행을 타고 상투성을 못벗는걸까? 번드르둥글둥글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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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줘 2020-08-2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문명은 번역 퀄리티 신경좀 썼으면 좋겠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평균 내보면 수준이하다
 
인간실격 무삭제판 1
이토 준지 지음, 오경화 옮김, 다자이 오사무 원작 / 미우(대원씨아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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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판본 리콜 해서 가격 보상이라도 해주든지. 웃긴 넘들이네. 이전 것도 가격이 저렴한 게 아니었고 게다가 19금 빨간딱지도 붙어있었잖아요. 기존판도 굳이 무리를 해 청소년에게까지 팔려고 수정 삭제했던 게 아니었을텐데 너무 한 거 아닌가요? 대원은 양심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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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터 스켈터
오카자키 교코 지음, 이소담 옮김 / 고트(goat)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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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는 와일드한데 최고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덜다듬어진 스케치 노트 같다. 파멸을 향해 치닿는 외통수가 와닿으려면 주변인물들이 더 펼쳐져야 할 것 같다. 작가가 진행형의 병중이라 그런 기대를 하기는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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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에지 River’s Edge
오카자키 교코 지음, 이소담 옮김 / 고트(goat)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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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에너지와 죽음의 에너지가 갈마들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결과적으로 보면 힙하게 잘 빠진 또 그렇다고 깍쟁이처럼 인위적으로 멋을 부린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이런 게 천재의 작품이라는 거겠지. 외식하는 도덕군자의 나라에서 나올수 없는 게 일본 만화엔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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