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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쓰레기
아이작 싱어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2년 11월
평점 :
절판
원제 SCUM
'악의 정수', '암흑의 심장heart of darkness' 따위의 집중된 상상력과는 다른,
인간세 최밑바닥의 찌꺼기 슬라임 형태의 무척추 보행으로 살아가는 인격파탄자,
경계선적 인격장애, 유형을 잡아내기 힘든 도덕의 장애 등등을 상상하면 된다.
맥스 배러번드, 그는 출세했다. 현재 마흔 일곱살. 바르샤바 20년전 어렸을 적엔
좀도둑질과 뒷골목 여인네 따먹기 행각으로 전전하다 감방신세도 몇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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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신대륙'은 20세기초 당시, 유럽대륙에서 치유할 수 없는 종교적 정치적 문제아들, 혹은 인간 형상을 한 처치곤란의 쓰레기들을 치우기 위해 마련된 광대한 여백의 지대처럼 지구의 한쪽 끝에서부터 나타났다. 대륙횡단 철도가 깔리고, 거대한 공장 굴뚝과 금속 성분이 함유된 매연, 시원시원하고 터프한 여자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다른 벼락부자들처럼 맥스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단 금의환향 따위가 아니다. 아들이 죽고 마누라는 폭주하고, 이 남자는 발기불능에 심리공황의 늪 지대에서 서성이다 미친듯 허우적대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방귀나 뀌면서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첫날 이디쉬어 신문을 읽는다. 어린시절부터 베어있던 탈무드와 랍비, 유대율법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있다. 아들은 이미 죽었다. 신문기사에서 강신술 영매 기사를 읽고 찾아간다. 열아홉살의 인텔리겐챠 성향을 보이는 랍비의 딸을 유혹한다. 남편이 없는 사이 이층 부엌에서 빵집 처를 유혹한다. 길거리 창녀가 유혹할 때 돈만 건네주고 미소짓는다. 시내 최고의 호텔에서 아침에 머무르다 다시 오후에 나갈 준비를 하고 룸메이드가 오늘 나가시는 게 아니냐, 묻자 발끈해서 체크아웃 날짜를 미룬다. 2주동안 죽어라고 일해봐야 빵한조각 살수있는, 쥐꼬리만한 급료를 받고사는 빨간머리 하녀를 꼬드겨 실랑이를 벌이다 치마끝에서 목밑 레이스까지 잡아찢는다. 안식일이라 마차를 타지않고 절룩이며 걷는 그녀를 부추겨 어두운 골목을 따라 같이 걷는다. 유혹한다. 같이 걷는다. 강신술 영매가 찾아온다. 유혹한다. 커피를 함께 마신다. 유혹한다. 거절한다. 남자는 돈이 많다. 당신이 떠나게 되면 저도 데려가주세요. 아저씨가 떠나게 되면 저도 데려가주세요.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싶어요. 남아도는 계집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지요. 일주일이면 50명도 모을 수 있다구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데려가서 같이 장사를 해보는 거에요. 거기엔 제 언니가 있죠. 당신이 떠나게 될 그때 연락 주세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탕 탕 탕
초반 50페이지 정도까진 지루하게 읽히다가 점점 속도가 붙고 나중엔 거의 마력적인 흡입력으로 빨려들어간다. 대단하다. 87세의 폴란드 출신의 유대계 늙은이가 쓴 거라고 믿기가 어려울 정도다. (1904년 출생, 1991년작) 유대의 신비주의 경향이 강한 우화같은 냄새가 나기도 하고 수시로 기분을 바꾸고 바꾼 감정의 현 상태 속에 최대한 몰입하고 미친듯이 방법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지쳐 어제처럼, 처음 이곳에 도착한 일주일전처럼 지쳐 침대에서 잠든다. 밤에 편하게 잠들지 않고 수시로 여러번 깬다. 거울을 보면 눈에서 노란 광채가 난다. 인격이 여러 개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정신은 묘하게 맑다. 낯선 이도시에 머무르는 십여일 사이에 수많은 거짓말과 터무니없는 계획들을 벌려놓고 수많은 사람들 (특히 매력적인 여인들)을 관계하게 한다. 스스로 머무르게 할 만한 명분이 되는 브레이크를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으니 모르는 척 미친 척 걸려넘어지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 물론 나는 고려원에서 나온 이물건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멋진 책이 절판되다니 안타까울 밖에. 번역도 매끄럽고 잘 읽혔는데.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와 널리 읽혔으면 한다.